본문 바로가기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우금

중앙일보 2012.01.16 00:00 종합 33면 지면보기
조선에는 세 가지를 금한다는 삼금(三禁)이 있었다. 함부로 술을 빚지 못하는 주금(酒禁), 소나무를 베지 못하는 송금(松禁), 소를 잡지 못하는 우금(牛禁)이었다. 그만큼 소가 귀했다. 김홍도의 ‘설후야연(雪後野宴)’이란 그림이 있다. 사대부들이 눈 내린 겨울 들판에서 기생들과 쇠고기를 구워 먹는 그림이다. 냄새 때문에 양반들도 들판에 나가서 구워먹어야 했다. 밀도살자를 엄하게 처벌해 성종 때는 먹으로 얼굴에 재우(宰牛 : 소 밀도살자)라고 새기기도 했다.

 아무리 엄금해도 밀도살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시장이 원하기 때문이었다. 소의 쓸개 속 덩어리인 우황(牛黃)도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이나 우황사심환(牛黃瀉心丸) 같은 약재에 꼭 필요했다. 그래서 특수한 경우에 도살을 허용했다. 조선 후기 공문서 양식 사례집인 『유서필지(儒胥必知)』에는 ‘부모의 병환에 전우고(全牛膏 : 우황)를 쓰게 해달라는 청원서 양식(爲親患用全牛膏所志)’이 있다. 또한 『유서필지』에는 다리 부러진 소를 잡기를 원한다는 땔감장수(柴商)의 요청에 관청에서 거피립본(去皮立本)이 마땅하다고 판결한다. ‘거피립본’이 도살을 원하는 백성과 관청 사이의 타협조건이다. 고기는 팔아 송아지를 사서 새 밑천으로 삼되 쇠가죽은 관청에 바치는 것이다. 조선 후기 18세부터 84세까지 꾸준하게 일기를 썼던 무관 『노상추(盧尙樞)일기』 순조 15년(1815) 4월조에도 소의 다리가 부러졌으니 ‘거피립본(去皮立本)’을 원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영조실록』 30년(1754) 1월 2일자는 “경조(京兆 : 한성부)에 명하여 우금을 늦추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밑이나 설날에는 우금을 잠시 늦추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순조실록』 6년(1806) 1월 5일자에 ‘세밑에 우금(牛禁)이 엄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조(秋曹 : 형조)와 경조(京兆) 당상관을 파직시켰다’는 기록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우금을 범하면 벌금으로 우속(牛贖)을 바치는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17년(1741) 7월 1일조는 ‘우속전(牛贖錢)’이 무려 1백여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소 값은 떨어지고 사료 값이 오르자 소를 굶겨 죽인다는 소식이다. 동물보호법으로 처벌을 검토한다지만 농민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산 쇠고기가 수입될 때 진짜 문제는 광우병이 아니라 축산농가 붕괴였다. 미리 예방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그때야 우왕좌왕하는 당국의 행태는 역시 반복되고 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