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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52) 장쉐량 군대

중앙일보 2012.01.15 21:29


▲1948년 11월 장제스는 미국에 추가 군사 원조를 요청했지만 미국이 리쭝런을 지지하자 이듬해 1월 총통직에서 하야했다. 대륙에서의 마지막 춘제를 앞두고 고향에 도착한 장제스. 1949년 1월 22일 저장(浙江)성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진. [김명호 제공]

장쉐량 군대, 국공내전 터지자 중공군에 줄줄이 투항



1949년 1월 21일 국민당 총재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패배를 예감했다. 민족 최대의 명절 춘제(春節)를 9일 앞두고 총통직에서 물러났다. 당일로 수도 난징을 떠나 고향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에 여장을 풀었다. 1927년 4월, 39세 때 상하이에서 정변을 일으켜 난징에 정부를 수립한 지 22년 만이었다. 부총통 리쭝런(李宗仁·이종인)이 직무를 대행했다.



총통직을 내놨지만 군대는 당의 군대였다. 장제스는 고향에서 국민당 군의 장장(長江) 방어전을 지휘할 심산이었다.

1월 26일, 리쭝런은 장쉐량의 석방을 지시하고 이튿날 베이징의 마오쩌둥에게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장쉐량은 12년째 연금 중이었다.



장쉐량의 연금을 관리하던 군사위원회는 리쭝런의 명령을 무시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이틀에 걸쳐 “리쭝런은 자유와 민주라는 말을 내세워 공산비적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투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를 함정에 몰아넣고 모든 것을 약탈하려고 작심했다. 내가 총통부를 떠난 지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며 리쭝런의 장쉐량 석방 명령에 분노하는 일기를 남겼지만 측근에게 상하이에서 투병 중인 후린(胡霖·호림)의 안부를 물었다. 후린은 중국을 대표하는 언론기관 대공보(大公報)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패망 몇 주일 후인 1945년 9월, 장제스는 충칭에서 후린과 밀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이날 후린의 건의는 충격적이었다. “국민당은 황하 이북의 국민들에게 기반이 약하다. 수도를 베이핑으로 옮기고 명칭을 베이징으로 바꿔라. 난징을 수도로 하다 보니 북방인들은 주류에서 밀려나 2등 국민으로 전락했다는 생각이 강하다. 공산당과의 담판은 성실하게 하고, 선전포고를 하려면 공개적으로 해라. 미국과는 의논할 필요가 없다. 일본인 점령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박해하지 마라. 일본인이 쳐들어오자 국민당은 허겁지겁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본은 1931년부터 15년간 동북을 점령했다. 특히 동북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 청년들에게 재교육을 시켜야 한다.” 장제스는 후린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었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과 함께 15년간 괴뢰황제 푸이를 내세워 동북(만주)을 통치하던 일본인들도 제 나라로 돌아갔다. 동북은 하루 아침에 무주공산으로 변했다.

동북 출신 정객들은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능가할 인물이 없고, 공산당도 장쉐량이 버티고 있는 한 동북을 넘볼 수 없다”며 동북의 최고통치자였던 장쉐량의 복귀를 요청했다. 1936년 겨울 시안(西安)에서 최고 지도자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합작을 요구해 성사시킨 후 장제스에 의해 연금 상태에 들어간 장쉐량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한때 자신을 배신하고 치욕을 안겨줬다는 이유로 장쉐량을 풀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중국인들이 많지만 장제스는 하야와 복귀를 반복한 대정치가이며 전략가였다. 공산당이 장쉐량을 옹립한다면 동북이 공산당의 천하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극비리에 대만으로 이송시키고 장쉐량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의 동북 귀환을 불허했다.



장제스는 동북을 9개 성으로 찢어 발기고 하얼빈과 창춘을 직할시로 바꿔버렸다. 성장은 공석으로 내버려 뒀다. 방치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국민당군은 싸우는 족족 패했다. 특히 동북에서의 패배는 치명적이었다. 다른 결정적인 전투에서는 예전에 장쉐량의 휘하에 있던 병력들 거의가 중공에 투항했다.



장제스는 1949년 4월 21일 밤 모교 강당에서 경극을 관람하던 중 중공군이 양자강을 도강, 난징 함락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후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3일 후 장제스는 영원히 고향을 떠났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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