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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를 위한 변명

중앙선데이 2012.01.14 23:20 253호 21면 지면보기
지난해 56세를 일기로 작고한 스티브 잡스는 혁신 리더로서 ‘세계 최고의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혁명을 이끌어냈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런 잡스, 그리고 그가 이끈 회사 애플과 곧잘 대비되는 회사가 삼성전자다. 잡스 사후에 ‘삼성전자는 왜 아이폰을 만들지 못하는가’라는 의문과 분석기사를 언론과 비평가들이 쏟아냈다. 삼성전자는 애플과 같은 기술을 거의 다 보유하고 있는데도 창조와 혁신 능력이 부족해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같은 혁신적 제품 시리즈를 먼저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본다. 삼성은 애플을 상당 기간 따라잡을 수 없는 2류 회사라는 혹평까지 나왔다.

최종학의 경영산책 ⑨

과연 그럴까. 미국의 세계 최대 컴퓨터 제조업체 델을 보자. 잡스가 애플을 창업할 때처럼 마이클 델은 대학교 기숙사에서 델을 설립했다. 현재 세계에서 퍼스널 컴퓨터(PC)를 가장 많이 파는 회사다. 델 때문에 컴퓨터의 명가 IBM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PC 사업부를 중국 레노보에 매각하고 시장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델은 신제품·신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를 별로 하지 않는다. 이미 개발된 지 오래돼 특허 없이도 생산할 수 있는 범용기술만을 이용한다. 주문을 받아 생산해 중간상 없이 고객에게 배달하니 경쟁사 제품에 비해 제품 가격은 평균 12%, 재고율은 평균 6%나 낮출 수 있었다.

미국의 TV 제조업체 비지오도 비슷한 예다. 생산과 애프터서비스·유통을 아웃소싱하면서 본사는 기획·마케팅·디자인 같은 업무만 한다. 델처럼 한물간 범용기술만을 쓰니까 생산원가가 낮다. 제품은 월마트 같은 창고형 대형 할인매장에서 박스째 쌓아놓고 판다. 뾰족한 제품이나 기술도 아닌데 두 업체는 PC와 TV 시장의 1위를 기록했다. 남들이 못 만드는 최고의 제품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이 두 회사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춘 회사는 많다. 두 회사는 남들이 다 만들 수 있는 제품을 남들보다 좀 더 싸게 만들어 파는 재주를 키웠을 뿐이다. 그렇다면 델과 비지오도 2류 기업일까. 첨단기술도 없으면서 이를 발굴하려는 R&D까지 소홀히 하니 말이다. 2류도 아니다. 삼성전자가 2류 소리를 들으니 델이나 비지오는 3류쯤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삼성전자에 대해 2류 딱지를 붙이는 건 온당치 않다. 삼성과 애플은 근본적으로 수평 비교하기 힘든 회사다. 사과와 귤을 양 손에 들고서 사과가 더 크니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과보다 귤이 더 달콤하고 맛있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TV·컴퓨터·냉장고·세탁기·프린터 같은 친숙한 전자제품을 삼성과 LG는 생산하고 있다. 이들 제품 중에서 삼성이나 LG가 발명한 제품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다면 신제품 한두 가지쯤 발명할 만한 혁신기술도 없는 2류 회사의 제품을 몇 개씩 사서 집집마다 쓰고 있을까. 심지어 미국·유럽 같은 선진국에서도 말이다.

삼성·LG는 애플과는 다른 종류의 회사이기 때문이다. 경영전략 분야의 대가인 송재용 서울대 교수는 삼성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라고 부른다. 첨단 제품을 앞장서 개발하지는 못하지만, 남들이 개발하면 신속하게 그 기술을 따라서 개발하는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얼마 후면 선발주자와 비슷한 제품을 더 싼 가격에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경쟁사와 비슷한 제품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성능이 더욱 개량된, 선발주자 제품보다 더 나은 제품을 내놓는다. 그래서 결국 시장의 최종 승자가 된다.

불과 20년 전까지 수십 년 동안 일본 소니는 창조와 혁신의 상징이었다. 1969년에 설립된 삼성전자가 2002년에 상장주식 시가총액 면에서 소니를 추월했으니 소니가 간 길을 삼성이 따라잡는 데 30년쯤 걸린 셈이다. 그것밖에 못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릴 수도 있다. 그런데 불과 20년 전만 해도 ‘삼성은 왜 소니를 따라잡지 못하는 만년 2류 기업일까’ 하는 자조가 회자됐다. 그런데 삼성이 소니를 앞지르니 그 다음에는 ‘왜 노키아·모토로라·마이크로소프트(MS)·애플을 따라잡지 못할까’ 하는 식으로 의문부호가 계속 변해왔다. 비교하는 회사 이름만 바뀌었을 뿐 비판 내용은 거의 똑같다. 삼성은 그중에서 노키아와 모토로라를 벌써 다 제쳤고 현재 MS와 자웅을 겨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다들 삼성을 도마에 올리면서 ‘LG전자는 왜 2류일까’ 같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성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은 건, 일류기업이라면 뭔가 겉으로 드러나는 큰 것을 바꾸는 것이 창조요 혁신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인 듯하다. 삼성은 그런 면에서 분명 애플보다 못하다. 그러나 삼성은 디테일에 강하다. 하나의 제품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어느 점을 개량해야 소비자들이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데 능하다. 그리하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문제점들을 하나 둘씩 개량해 나간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그 결과 5년, 10년이 지나면 삼성이나 LG의 제품은 아주 우수한 제품으로 탈바꿈해 시장에서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아이슈타인이나 에디슨·잡스 같은 천재가 왜 삼성에는 없을까 한탄할 수 있다. 매킨토시·아이폰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엎어 버리는 신제품을 창조할 능력이 부족할 수 있다. 삼성·LG는 이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2009년 11월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된 지 다섯 달 만에 거의 유사한 성능을 가진 갤럭시 스마트폰을 시장에 내놓을 만큼의 능력이 있다. 델이나 비지오처럼 다른 업체가 개발한 것의 개량제품을 5년 이상씩 늦게 출시하는 것과 다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삼성·LG가 30년 후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애플이 최고 기업 소리를 듣지만 90년대 이후 10년 이상 애플은 뾰족한 히트상품 없이 망할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 모든 것을 몸소 총지휘하던 잡스의 사후 애플이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처럼 무서운 기세로 발전할 수 있을까. 애플도 완벽한 기업은 아니다.

삼성과 LG가 이것밖에 못하느냐고 질타할 것이 아니라, 삼성과 LG가 한국 회사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디어 하나로 대박을 터뜨려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매일매일 열심히 일해 조금씩 저축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성공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 일류기업이 되는 길도 하나만은 아니다. 30년 뒤의 괄목상대한 삼성과 LG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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