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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대형 투자은행, 65년 전 담합 망령 되살아나

중앙선데이 2012.01.14 23:19 253호 21면 지면보기
1947년 미국 정부는 뉴욕 월가의 투자은행(IB) 17곳을 독점금지법 위반 혐의로 제소했다. 당시 미 법무부는 “투자은행들이 1915년부터 조직적으로 경쟁을 무력화하고 시장을 독점해 왔다. 담합을 통해 ‘알짜 비즈니스(cream of the business)’를 독차지했다”고 주장했다. 모건스탠리·골드먼삭스와 같은 정상급 업체들이 한통속이 돼 채권 발행 수수료, 인수합병(M&A) 컨설팅 비용 등을 정해 놓고 군소 업체의 진입을 막는 카르텔을 형성해 왔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었다. IB 업계는 공고한 카르텔이었다. 소수의 힘센 IB들이 가격을 정하고 고객의 선택 폭을 제한하며 시장을 쥐락펴락했다.

지금의 월가도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다. 투자은행 업계에는 65년 전보다 더 강력하고 위협적인 카르텔이 등장했다. 2007년 시작된 금융위기로 인해 베어스턴스·리먼브러더스가 문을 닫았다. 골드먼삭스·모건스탠리·JP모건·씨티그룹·뱅크오브아메리카·도이치뱅크 등을 제외한 대부분 중소형 IB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결과적으로 예전보다 더 적은 수의 IB가 더 많은 수익을 차지하는 상황이 됐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불행하게도 1953년 10월 미 연방법원은 미국 정부가 투자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반독점법 위반 소송에 대해 ‘분명한 증거가 없다’며 IB들이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대형 IB들이 자신들의 사업영역을 지키고, 경쟁업체가 ‘돈 되는 고객’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힘을 실어줬다.

오늘날의 월가도 독점금지법 위반 관련 소송 소식이 들리지 않을 뿐 대형 IB들이 담합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금융위기 이후 살아남은 IB들은 시장지배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가격 담합행위를 하고 있다. 물론 IB들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업계는 ‘기업공개(IPO) 수수료 7%, 고수익 채권 인수 수수료 3%’라는 관행적 규칙이 있다는 것을 다 안다. 심지어 M&A 비용의 경우 리먼브러더스가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이른바 ‘리먼 공식’(Lehman formula)에 따라 결정된다.

2004년 8월 구글 IPO 때 상황은 좀 바뀌는 듯했다. 당시 구글은 주간사와 전문가들이 공모 가격을 결정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경매처럼 입찰을 통해 공모가를 결정하도록 했다. 대형 IB의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듯했다. 월가의 기득권자들은 이런 방식이 자신들의 가격 담합 체제를 무너뜨릴까 봐 우려했다.

그러나 이후 구글과 같은 방식의 IPO는 좀체 보기 힘들다. 이미 상장된 징가(Zynga)와 그루폰, 다음 달 IPO를 앞둔 페이스북도 구글 방식을 고려하지 않는다. 소수의 IB들로 이루어진 카르텔이 여전히 IPO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2008년 위기에 빠진 월가를 다시 살려주자는 결정은 카르텔에 새로운 힘을 실어주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경기가 완전히 회복되면 월가 기득권층의 강철 같은 지배력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지난해 미국 2위 통신업체 AT&T와 도이치텔레콤의 합병 계획을 무산시켰다. 독과점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그동안 월가에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행정부가 담합과 독점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이제 월가의 카르텔을 깨고 자본시장의 질서를 바로 세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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