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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안테나, 디지털 아트 <10> ‘예술 독립군’ 플럭서스 그룹의 등장
여기에 고급스러운 미술관 갤러리의 분위기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포장하는 평론가들이 합세하면 대중은 주눅이 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갖게 된다. 이를 두고 조직적인 전문가 범죄라고 보드리야르는 일갈한다. 실제로 수백억, 수천억의 돈이 오간다. 백남준이 ‘예술은 고등 사기’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뭔가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꽝(‘텅 빔’)인 것, 그러나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기에 모호하게 아이러니와 지적 유희를 방패 삼아 자기유용성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이 현대 예술의 운명적 귀착점인가? 헤겔식의 ‘절대정신’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 아쉽게도 종말을 고한 이후 보편과 절대의 자리를 개별과 상대가 차지하면서 예술은 다원화 시대를 맞게 되었다.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등장한 60년대부터다. 브릴로 박스는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본격적으로 무너뜨린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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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디선가 ‘독립군’이 나타났다. 역시 60년대 일이다. 진선미의 고전적 가치를 열망하던 예술이 타락한 천사처럼 돈(시장)과 연합해 순진한 인간들을 호도하는 것에 반대하며 일어난 ‘예술 독립군’이었다. 흔히 ‘전위 예술가’로 통하는, 때론 장난 같기도 하지만 대부분 알 수 없는 행위나 퍼포먼스로 충격을 주는 이름하여 플럭서스(FLUXUS)라는 그룹이다. 음악, 미술, 무용, 시, 영화 등 다양한 장르 사이를 스스럼 없이 드나들며, 날로 상업화돼 허망한 ‘새들의 치장’으로 전락해 가는 기존 예술에 대한 ‘반(反)예술’ 내지 ‘대안(代案)예술’을 제시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머스 커닝햄이라는 안무가의 작품은 무용수들의 가위, 바위, 보로 시작한다. 결과에 따라 매번 다른 시퀀스의 춤을 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존 케이지의 ‘4분33초’는 그야말로 4분33초 동안 연주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 들려오는 관객의 움직임과 소리가 음악의 내용을 이룬다. 케이지는 이 작업에서 우연(chance)이라는 요소를 처음으로 예술에 도입했다. 동양사상에 심취한 그는 예술의 행위도 주역에서 괘를 뽑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오노 요코는 천을 온몸에 칭칭 감고 나타나 관객들에게 가위를 주며 자르라 권한다.(작은 사진) 오노의 알몸이 드러나기까지 관객은 천을 자른다. 왜? 예술과 예술가가 누더기처럼 입고 있는 포장을 벗겨내라는 지시가 아닐까? 가위로 자른 것으로 치면 백남준이 60년 스승 격인 존 케이지와 협연하고선 애송이 주제에 겁도 없이 케이지의 넥타이를 싹둑 자른 것이 원조다. 백남준은 스스로를 ‘황색위험’으로 칭하며 백인 남성의 심볼에 가차없는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의 해프닝 예술은 빌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실수로’ 바지를 내린 것이 백미였다.)
플럭서스 아티스트들은 모든 인위적인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물질적인 소산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했고, 특히 관객의 참여를 강조했다. 다학제적이며 비선형적인 이야기 구조, 열린 체계, 우연성과 즉흥성, 그리고 관객과의 상호작용 등은 그대로 다음 세대의 디지털 아티스트들에게 전수됐다. 이들은 또 플럭서스 박스라는 것을 만들어 매뉴얼과 소품들을 장착해 누구라도 이들의 예술을 따라 하고 변용할 수 있도록 했다. 디지털 시대에 유행하는 ‘D.I.Y.(Do-It-Yourself) 예술’의 효시였다. 삶과 예술을 통합하는 것을 궁극적 지표로 삼았던 이들의 활동은 70년대 말부터 수그러들었지만 플럭서스 정신은 디지털 아트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