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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공생발전, 대기업 중역에 열쇠 있다

중앙선데이 2012.01.14 22:55 253호 30면 지면보기
#1. 지난해 12월 하순 한 중소기업 송년 만찬 모임. 10명 가까이 둘러 앉아 한 해를 회고해 보자는 1분 스피치를 누군가 제안했는데 금세 대기업 성토장이 돼 버렸다. 한 업체가 협력 대기업과의 억울한 거래 경험을 토로하면서 차분하던 친교 모임이 격앙된 비판장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용두사미, 씁쓸한 자조로 끝났다. “큰 기업의 일감을 따 먹고 사는 이 땅의 ‘수주 업종’ 중소업체들은 인내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홍승일 칼럼

#2. 한 대기업의 A상무는 지난해 말 대표이사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에 올라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안됐지만 그만둬 달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50대 초반 나이에 너무 뜻밖의 해직이라 충격이 컸다. 하지만 무슨 큰 잘못이 있었는지, 평소 무엇이 부족했는지 끝내 설명을 듣지 못했다.

대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인들의 뿌리깊은 원성, 그리고 ‘임시 직원’의 준말이라는 임원의 고용 불안. 얼핏 무관한 듯한 이 두 장면이 겹치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요즘 유행어가 된 대기업·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공생발전이다. 왜 그런가.

#1을 좀 더 클로즈업해보자. 한 음향기기 업체는 국내 굴지 대기업과 납품 계약을 하고 생산시설과 원자재 마련에 적잖은 선투자를 했다. 하지만 “경기가 불투명해 사업계획을 바꿨다”는 말과 함께 해당 업체로부터 발주 자체를 없던 일로 하자는 일방 통보를 받은 게 지난해 초였다. 수억원이 물린 프로젝트라 소송까지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원청 대기업에 법적 대응을 하는 건 자살행위지요. 소송을 이기기도 어렵지만 이기더라도 대기업에 대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매장됩니다.” 지난해 내내 설득과 간청을 거듭해 11월께 일부만 보상받고 합의해 줬다. 이어 정보기술(IT) 솔루션 업체를 운영하는 여사장이 일어섰다.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려다 얼떨결에 비즈니스에 뛰어든 게 수년 전인데 올해 처음 뜨거운 맛을 봤다”며 말문을 열었다. 거래 대기업이 ‘소프트웨어 전문인력을 확보하라’는 최고경영진 지시에 따라 몇 안 되는 숙련 엔지니어를 웃돈 주고 줄줄이 빼갔다는 것이다. 주요 사업이 차질을 빚는 바람에 올해 회사 설립 후 가장 큰 폭의 적자를 냈다고 했다. 첨단 통신기술을 자랑하는 한 정보기술(IT) 업체 대표는 사업 환경이 점점 척박해져 오랜 사업을 접었다고 했다. 대신 사업을 정리한 돈으로 서울 강남 번화가에 대형 부페식당을 내는 등 요식 사업자로 변신했다. 이런 중소기업인들의 원성은 도처에서 쉽사리 들을 수 있다. 직업훈련학원을 운영하던 한 지인은 중견기업의 영업직 교육대행을 해준 대금이 수억원이 몇 년째 밀려 결국 부도를 내고 회사를 정리했다. 한 통신업체 최고경영자가 전직 검사 출신을 경영진으로 영입해 사내 협력업체 비리를 발본해 당국에 고발하는 극약처방까지 쓴 일은 아직도 회자된다. 대기업 협력업체로는 미래가 없다는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대기업 동물원론’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지층을 넓혀가고 있다.

#2를 들여다보자. 대기업에 거래 한번 틀려고 담당 임원 만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만한 사람은 안다. 대기업의 담당 임원은 중소업체들한테는 갑 중의 갑, 수퍼 갑이다. 하지만 이런 임원들 역시 1년에 한번 닥치는 정기인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존과 승진을 위해 살인적 실적 경쟁에 내몰린다. 지난해 말 삼성은 501명, 현대·기아차 그룹은 465명의 임원 승진인사를 했다. 실적 좋은 계열사가 많아 역대 최대 승진 잔치였다. 하지만 승진자가 많다는 건 그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옷 벗는 임원 또한 그만큼 된다는 뜻이다. “작은 협력업체 하나 제대로 길들이지 못하면 임원 자격이 없다”고 일갈한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말이 한동안 업계에서 회자된 적도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30대 그룹 총수는 청와대로 불려가 중소 협력업체들과의 상생을 다짐한다. 하지만 이를 현장에서 실천할 임원들이 무한 실적 경쟁에 내몰리면 공염불과 다름없다. 앞으로 대기업 임원 평가 항목에 동반성장 기여도를 넣겠다는 곳이 어디인지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대기업들이 지금처럼 임원과 간부들을 수익 같은 실적 수치로만 평가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익을 좀 덜 내더라도 비즈니스 생태계를 키우겠다는 최고경영진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임원들도 안심하고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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