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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정치가’는 없다

중앙선데이 2012.01.14 22:50 253호 31면 지면보기
동물이 나이 들면 생물학적 유전자를 남길 기회나 확률이 현저히 줄어든다. 자연의 이치다. 그래서 ‘문화 동물’인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문화적 유전자(DNA)를 세상에 남기려고 애쓴다. 다양한 모임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필자도 기회총량 불변의 법칙에 따라 연기했던 송년 모임을 신년에 참석하면서 이를 절감한다. ‘기억은 유한하고 기록은 무한하다’는 명제와 더불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의미를 실감하는 요즘이다. 책·자료를 읽다가 메모해 놓는 ‘적바림 노트’를 뒤적이다가 몇 년 전에 기록해 두었던 짧은 글들을 여기에 옮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다. 미국 국회도서관의 사서(司書)가 세계에서 가장 얇은 책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 결과 미국의 고고학사, 아르헨티나의 경제정책, 영국의 요리책, 인도의 위생학, 에티오피아의 건강관리법, 스위스의 유머집, 중국의 기본인권발달사, 독일의 패션, 브라질의 정의론, 폴란드의 근면론, 한국의 정치윤리책이 가장 얇았다는 것이다.

#미국은 79년 연방선거운동법을 제정해 정치인들에게 3개월마다 정치자금 내용을 연방선관위에 보고토록 했다. 또 100달러 이상의 정치헌금에 대해서는 자금추적이 가능한 수표 기부를 원칙으로 했다. 77년에는 록히드 사건을 계기로 뇌물을 주고받은 기업과 공무원을 상대로 최고 2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부패방지법을 제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전 세계 뇌물 규모가 연 100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다국적 석유기업인 셸은 76년 이탈리아에서 450만 달러의 정치헌금을 강요받자 지사장을 해고한 뒤 곧바로 철수했다. 그 후 셸은 14년간이나 이탈리아에서 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사업 파트너가 될 수 없는 나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 웨이상진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부패인지지수가 싱가포르 수준에서 말레이시아 수준으로 떨어지면 한계조세율이 20%포인트 이상 오르는 효과를 낸다고 한다. 한계조세율이 1% 증가하면 외국인 직접투자가 4.8% 감소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나라 전체가 건망증 환자처럼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국회의장의 현금봉투 사건은 우리 국민을 후진국 국민으로 격하시킨 일이다. 사회 전체가 부패의 도가니인 정치권을 닮아가는 모방적 동형화(isomorphism)를 목도하면 좌절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부패’ 키워드를 검색하면 100칸 한옥의 창보다 더 많은 창에 우리나라의 부패사건 제목이 빼곡하게 정렬된다.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제가 현대에선 대의민주제로 변하더니 요즘 정보사회에선 ‘자기대표제’로 바뀌고 있다.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의 모바일 선거인단에 젊은이들이 대거 몰렸다. 그런데 정치인 대부분이 TGIF(트위터, 구글, 아이폰, 페이스북의 머리글자의 조합)를 패밀리레스토랑으로 알고 있는 상황에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것들이 십수 년 토박이 당원과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린다. 뇌 손상 이후 생길 수 있는 희귀한 의학적 증상 가운데 안톤의 실명(Anton’s blindness)이 있다. 시력을 잃고서도 자신이 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일종의 ‘질병 인식 불능증’이다. 부패의 실명자와 함께 국민이 보인다고 착각하는 안톤의 맹목환자들을 이번 총선에서 걸러낼 책임은 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지구상에는 없는 게 다섯 가지 있다고 한다. 독일인 코미디언, 미국인 철학자, 영국인 요리사, 일본인 플레이보이, 한국인 정치가다. 나의 적바림 노트엔 이 대목에서 ‘?’ 부호가 붙어 있다.



강성남 1992년 서울대 행정학 박사 학위를 딴 뒤 대학·국회·시민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저서로 『부정부패의 사회학』 『행정변동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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