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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톨 박’과 한날 사망...배달사고 弔花에 묻혀 우화 주인공처럼 가다

중앙선데이 2012.01.14 19:42 253호 31면 지면보기
소설가 오상원. 사진 삼성출판사 제공
1985년 12월 3일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오상원이 간암을 앓다가 입원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날 오후 그의 빈소에는 각계각층에서 보낸 조화가 산더미처럼 밀려들어와 빈소의 입구를 찾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가 5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였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한 언론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상원은 70년대 이후 소설가로서 이렇다 할 작품활동을 보이지 못했고, 언론인으로서도 80년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논설위원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 출판국 심의위원의 한직을 지키고 있었으니,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머리를 갸웃거린 것은 당연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2> 사회 부조리 풍자한 오상원

아니나 다를까 오상원 빈소에 산더미같이 쌓였던 조화들은 불과 한두 시간 만에 모두 치워져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사연은 이렇다. 오상원이 숨을 거둔 지 몇 시간 뒤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전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사망했다. ‘피스톨 박’이라 불리던 박종규는 현직 대한체육회 회장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국회의원과 경남대학교 이사장까지 역임했으니 그의 죽음은 곧바로 널리 알려졌고, 빈소가 채 차려지기도 전에 조화가 몰려들어 오상원의 빈소에 잘못 배달됐던 것이다. 기이하게도 두 사람은 똑같은 1930년생으로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사인도 똑같은 간암이었다. 그 ‘조화 사건’은 자신이 쓴 ‘오상원의 우화’처럼 다분히 우화적인 요소가 있었다.

평북 선천 태생인 오상원은 고향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가족과 함께 서울에 정착해 용산고를 졸업한 뒤 49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내려가 피란지 캠퍼스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때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려 다닌 친구들이 불문과 동기생인 박이문(철학자), 이일(미술평론가), 김정옥(연극연출가)과 연세대생이던 정창범(문학평론가), 그리고 얼마 뒤 ‘스타’ 다방에서 자살해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시인 전봉래 등이었다. 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술을 마시며 인생과 예술 특히 프랑스 문학에 관한 이야기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이화여대에 다니던 이영희를 사이에 두고 박이문과 정창범이 해변 모래사장에서 이발소용 면도칼로 결투를 벌인 이야기, 오상원과 이일이 만취해 한밤중에 이일의 사촌형이 사는 하숙집에 찾아가 “술을 내놓으라”고 주정을 부려 석유가 가득 든 됫병을 내놓자 술인 줄 알고 마구 들이켰다…는 일화들이 고은이 쓴 ‘1950년대’에 실려 있다.

오상원은 대학 시절부터 뛰어난 글 솜씨를 보였다. 4학년이던 53년 신극협의회의 희곡 현상공모에서 ‘녹스는 파편’이 당선하고 55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유예’가 당선해 등단했다. 작가로서의 성장 속도도 빨라 58년 ‘모반’으로 ‘사상계’가 주관하는 제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모두 전쟁을 겪은 후의 혼란과 상흔으로 얼룩진 50년대 한국사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이때부터 오상원은 선우휘와 함께 ‘행동하는 휴머니즘 작가’로 불렸다. 이듬해 장편소설 ‘백지의 기록’을 발표해 중견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히지만 60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61년 야심을 가지고 ‘사상계’에 장편소설 ‘무명기’의 연재를 시작했다가 서너 달 만에 중단한 것이 적신호였다. 그래도 2~3년에 한 편씩이나마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오다가 70년대 들어서부터는 그의 소설을 대할 수 없게 되었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초조함과 허허로움을 술로 달래려 했는지 그렇지 않아도 술이 세기로 소문나 있던 오상원의 음주 습관은 70년대 들면서 ‘마구잡이 폭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해장해야 한다”며 이른 아침부터 소주 한 병을 해치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문단과 언론계를 통틀어 그를 ‘최고의 술꾼’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무렵에는 수염도 자랄 대로 자라 ‘오스트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의 수염과 닮았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문인이나 회사 동료가 자주 드나드는 술집에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오스트로가 떴다!”고 수군대며 모두 딴전을 피우거나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붙잡히면 밤새워 대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소설에 대한 미련은 떨쳐버릴 수 없었던지 논설위원실로 자리를 옮긴 70년대 중반부터 정치와 사회 현실의 부조리를 풍자한 우화 형식의 글들을 발표했고, 이 글들을 모아 78년 백인수의 삽화를 곁들여 ‘오상원 우화’를 펴냈다. 80년대 들어서도 ‘산’ ‘겹친 과거’ 등 회고적인 성격의 단편소설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무렵 그의 건강 상태는 최악을 치닫고 있었다. 손이 떨려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병원에는 가지 않고 술을 계속 마시며 약국에서 주는 약으로 하루 하루를 버텼다. 85년 11월 중순께 명치끝이 너무 고통스러워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 해서 곧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결국 보름 만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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