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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2> 사회 부조리 풍자한 오상원
평북 선천 태생인 오상원은 고향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가족과 함께 서울에 정착해 용산고를 졸업한 뒤 49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내려가 피란지 캠퍼스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때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려 다닌 친구들이 불문과 동기생인 박이문(철학자), 이일(미술평론가), 김정옥(연극연출가)과 연세대생이던 정창범(문학평론가), 그리고 얼마 뒤 ‘스타’ 다방에서 자살해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시인 전봉래 등이었다. 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술을 마시며 인생과 예술 특히 프랑스 문학에 관한 이야기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이화여대에 다니던 이영희를 사이에 두고 박이문과 정창범이 해변 모래사장에서 이발소용 면도칼로 결투를 벌인 이야기, 오상원과 이일이 만취해 한밤중에 이일의 사촌형이 사는 하숙집에 찾아가 “술을 내놓으라”고 주정을 부려 석유가 가득 든 됫병을 내놓자 술인 줄 알고 마구 들이켰다…는 일화들이 고은이 쓴 ‘1950년대’에 실려 있다.
오상원은 대학 시절부터 뛰어난 글 솜씨를 보였다. 4학년이던 53년 신극협의회의 희곡 현상공모에서 ‘녹스는 파편’이 당선하고 55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유예’가 당선해 등단했다. 작가로서의 성장 속도도 빨라 58년 ‘모반’으로 ‘사상계’가 주관하는 제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모두 전쟁을 겪은 후의 혼란과 상흔으로 얼룩진 50년대 한국사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이때부터 오상원은 선우휘와 함께 ‘행동하는 휴머니즘 작가’로 불렸다. 이듬해 장편소설 ‘백지의 기록’을 발표해 중견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히지만 60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61년 야심을 가지고 ‘사상계’에 장편소설 ‘무명기’의 연재를 시작했다가 서너 달 만에 중단한 것이 적신호였다. 그래도 2~3년에 한 편씩이나마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오다가 70년대 들어서부터는 그의 소설을 대할 수 없게 되었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초조함과 허허로움을 술로 달래려 했는지 그렇지 않아도 술이 세기로 소문나 있던 오상원의 음주 습관은 70년대 들면서 ‘마구잡이 폭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해장해야 한다”며 이른 아침부터 소주 한 병을 해치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문단과 언론계를 통틀어 그를 ‘최고의 술꾼’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무렵에는 수염도 자랄 대로 자라 ‘오스트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의 수염과 닮았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문인이나 회사 동료가 자주 드나드는 술집에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오스트로가 떴다!”고 수군대며 모두 딴전을 피우거나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붙잡히면 밤새워 대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소설에 대한 미련은 떨쳐버릴 수 없었던지 논설위원실로 자리를 옮긴 70년대 중반부터 정치와 사회 현실의 부조리를 풍자한 우화 형식의 글들을 발표했고, 이 글들을 모아 78년 백인수의 삽화를 곁들여 ‘오상원 우화’를 펴냈다. 80년대 들어서도 ‘산’ ‘겹친 과거’ 등 회고적인 성격의 단편소설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무렵 그의 건강 상태는 최악을 치닫고 있었다. 손이 떨려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병원에는 가지 않고 술을 계속 마시며 약국에서 주는 약으로 하루 하루를 버텼다. 85년 11월 중순께 명치끝이 너무 고통스러워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 해서 곧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결국 보름 만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