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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3.칼을 베어버린 꽃잎 (8)

중앙일보 2012.01.14 01:12 주말섹션 10면 지면보기
“가야산 해인사가 아니라 수미산 바위동굴 속이라도 안 됩니다!”


경판은 사람들이 경배하는 성물입니다
마차 기둥이 우지끈 부러지고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차는 앞에서 걷던 무사들 몇을 후려치고서 그대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최이와 만종이 길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진명국사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수기와 천기, 만종은 어리둥절해 했고, 최이는 알 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임진년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옛날 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임진년의 악몽이란 고려인들 모두가 아는 참화였다. 대구 공산 부인사에 모셔두었던 초조대장경을 몽골군이 불태워버려서 그 원한이 산천을 뒤흔들었다.



 감히 부처님 말씀을 새긴 경판을 불태우다니! 개망나니만도 못한 놈들이다!



 그 울분과 원한의 힘으로 재조대장경 불사가 시작됐고 바야흐로 완성단계에 와 있었다. 전쟁 통에 굶주리고 헐벗은 채 매달려온 집념의 세월이었다. 깊은 산중과 섬에 숨어서 진리의 말씀들을 새겨온 세월이 어언 십년을 훌쩍 넘었다.



[일러스트=이용규]




 “…하여 새로 새긴 팔만대장경 전부를 한 장소에 모시면 절대 안 됩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는 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래도 거룩한 팔만대장경 경판 전체를 한 곳에 모셔야 불력(佛力)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현종 때 거란군이 물러간 것처럼.”



 천기가 이백여 년 전, 기적 같았던 일을 상기시켰다. 거란이 쳐들어왔을 때, 온 백성이 힘을 합쳐 대장경을 새기자 거란군이 물러갔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래요. 부처님의 가피란 참으로 불가사의하지요. 문제는 한 곳에 모셨을 때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오.”



 진명국사의 우려는 천기를 고심하게 만들었다.



 “그럼 다른 대안을 찾아봐야겠군요. 임진년 참화 후, 아버님께서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것처럼 획기적인 대안 말입니다.”



 만종은 최이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50권 28부를 금속활자로 인출(印出)한 사실을 거론했다. 구리와 쇠, 납을 섞어 만든 금속활자는 습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불에 강하기로는 나무에 비할 바 아니었다. 인쇄할 때 활판에 심어 쓰다가 평소에는 해체해서 보관할 수 있었고 목판보다 훨씬 양이 적어서 옮기기도 쉬웠다.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대장경 경판은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이 경배하는 성물(聖物)입니다. 기능성과 편리함만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대장도감 최고책임자 수기였다.



 “그렇소. 진리의 말씀이 담긴 대장경판은 든든한 신물(信物)이자 문명국의 상징이오. 이곳 강도는 고려의 도경이 아닙니까? 그래서 당연히 경판을 이곳에 모셔둬야 한다는 거요. 야만인들로부터 도경과 경판을 함께 지켜낸다는 명분도 있고요.”



 진명국사의 논조는 돌을 쪼개듯 분명했다.



 “국사의 말씀이 백 번 옳아요. 이곳 선원사 판당 경판은 그대로 두는 게 좋겠소이다. 훼손된 경판은 수시로 보충하면 될 것이오. 남해 분사도감 판당이나 그 밖의 절집과 공방에 있는 경판들만 우선 해인사에 모십시다. 그랬다가 꼭 필요하면 우리 절집에 있는 경판을 옮겨가든지 다시 새기면 될 것 아니오.”



 최이가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권력과 재물을 모두 가진 최이 집정이었다. 그의 말이 지닌 힘은 진명국사나 수기 도승통의 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해인사에 장경판전을 세워 경판들을 옮기는 일이 남았다. 그 일은 해인사 주지와 각 종단을 대표하는 스님들을 불러 모아서 결정하기로 했다.



 최이는 선원사 대중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마차에 싣고 온 찹쌀과 콩으로 떡과 두부를 하게 했던 것이다. 선원사에 올 때마다 늘 해온 일이었다. 선원사가 그의 원찰이었으므로 결국은 제 식구 챙기기였다.



 그는 해가 이울기 직전까지 잔치를 즐기다가 아들 만종과 함께 귀로에 올랐다. 중성(中城) 동문을 통해 진양부로 가기로 했다.



 “아버님, 수기나 천기는 참 믿을 만한 스님들이네요. 임진년 참화의 내막을 소상히 알면서도 대장경 경판에 대한 숭배가 지고지순하기만 합니다.”



  만종은 절집에서 눈치껏 얻어 마신 술로 얼굴에 때 이른 단풍이 든 상태였다.



 “그래요? 진명국사는요, 스님?”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최이가 아들 만종에게 묻는다.



 “아주 정치적이지요. 경판을 분산해서 모시자는 발상부터가 정략적인 계산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임진년의 악몽이라고 말할 때 표정도 그랬습니다. 은근히 그때 일을 비웃는 것 같았거든요.”



 만종은 자기 나름대로 파악한 승려들의 경향을 아버지 최이 집정에게 이른다.



 “그때 일은 기억에서 지워버려요!”



 최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 정치적인 거야 세 스님이 다 똑같지요. 종단을 대표하는 분들인데 어떻게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겠어요. 같은 사굴산문(<95CD> 堀山門) 문중이시면서 진명국사를 미심쩍어하다니요. 오히려 수기 스님을 주의 깊게 보세요.”



 수선사, 선원사, 쌍봉사, 단속사는 모두 같은 사굴산문에 속했다. 선원사 주지인 진명국사는 조계산 수선사 출신이었고 만종은 쌍봉사로 출가했다가 지금은 단속사 주지로 있었다.



 “수기나 천기도 다 같이 화엄종단 균여 스님 계열 아닙니까?”



 “그렇지요. 스님은 같은 종단 스님보다 다른 종단 스님을 더 믿으시겠단 말이로군요.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구색 갖추기로 화엄종과 유가종, 천태종, 가지산문(迦智山門)을 동원했지만 어디까지나 판각사업은 우리 사굴산문 중심으로 하는 겁니다. 수기와 천기 스님은 머리를 빌리는 것뿐이지요.”



 “같은 화엄종단이라도 해인사와 부인사는 또 다르잖습니까? 해인사는 균여 스님 계열이고 부인사는 의천 스님 계열이니까요.”



 종단의 문제가 아니라 승려 개개인의 문제라는 게 만종의 생각이었다.



 “… 남해 분사도감에서는 가지산문 출신 선승 일연을 참여시키고 있다 합니다.”



 “그야 내 처남 정안이 끌어들인 거고요. 그 사람 한번 올라오라는데도 꼼짝하지 않네, 거 참.”



 남해로 낙향한 이래 좀처럼 도성 나들이를 하지 않는 정안이었다. 처남이지만 정안이야말로 최이가 잃어버린 측근 가운데 최측근이었다. 정안은 최이의 독재를 말리다가 미움을 사자 고향으로 달아나 목숨을 구한 자였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게 판각불사를 제 일처럼 돕는 거였다.



 “그자 제가 길 좀 들여서 올려보낼까요?”



 만종이 주먹을 쥔다. 아버지의 처남이지만 기생첩에서 난 자신들과는 남남이었다.



 “아, 아닙니다, 스님. 내가 알아서 합니다.”



 아들 형제의 성정을 너무도 잘 아는 최이는 고개를 젓는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자를 감싸시고 수기 도승통 같은 실력자는 왜 의심하세요?”



 “수기는 이규보 상국이 천거한 스님이지만 좀처럼 속내를 안 드러내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말이 없어야 진짜 중이지요.”



 “그런가요?”



 세속 최고 권력자 아버지와 승단의 숨은 실세 아들을 태운 쌍두마차는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도성 안으로 들어섰다. 낮 동안의 더위는 저녁 바닷바람에 꺾였고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큰길가 기와지붕 누각 처마 곳곳에 노란 등롱이 밝혀졌다. 밥 짓는 냄새와 거문고 뜯는 소리가 기막히게 달콤한 초저녁이었다. 전쟁에 밀려 숨어들어온 도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슈슈- 슈잉!



 “어이쿠!”



 바람을 가르는 쇳소리 뒤끝에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버님!”



 어깨를 감싸고 엎드린 최이를 만종이 몸으로 덮었다.



 지지직 펑!



 커다란 굉음과 함께 시뻘건 번갯불이 일어났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차 기둥이 우지끈 부러지고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차는 앞에서 걷던 무사들 몇을 후려치고서 그대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최이와 만종이 길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기습이다! 쥐새끼 한 마리도 못 달아나게 주변을 봉쇄하라!”



 호위무사들을 지휘하던 상장군이 외쳤다. 무사들이 최이 부자를 겹겹이 둘러싸는 한편 큰길과 골목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왼쪽 누각 지붕이다!”



  “저놈들 잡아라!”



 시커먼 그림자는 삽시에 사라졌고 길바닥으로 기와가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무사들이 사라진 그림자를 쫓느라 누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누각을 벗어난 그림자는 즐비한 초가지붕 위를 겅중겅중 건너 검푸른 어스름 속으로 가무러졌다. 컹컹 개 짓는 소리가 빈 공중에 울려퍼졌다.



 “어서 새 수레를!”



 두 대의 수레가 징집되었고 부상당한 최이와 만종을 뉘어 싣고 진양부로 내달렸다. 다른 패들은 봉의 영감을 부르러 달려갔다. 비보를 들은 최항은 즉시 도성 안에 계엄령을 내렸다. 도방 정예부대원을 풀어서 괴한들을 색출하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왼쪽 어깨에 화살을 맞은 최이 집정은 허리까지 크게 다쳤고 만종은 팔이 부러졌다. 만종은 말들이 날뛰어서 부상이 더 커졌다며 당장 목을 쳐버리라고 으르렁댔다. 두 필의 말이 피를 뿌렸다.



 “믿을 수 없어요. 맑은 하늘에서 번갯불이 떨어졌으니까요.”



 상장군이 반쯤 얼이 빠져 주억거렸다. 그도 곧 목이 떨어질 판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냐!”



 최항은 칼을 빼들고 책임을 물으려 했다.



 “저, 정말입니다요. 별장들에게 물어보시오.”



 “지주사 나리, 사실입니다. 지지직 쾅 소리가 나면서 번쩍하는 섬광이 일어났어요.”



 “그렇습니다요. 연기도 자욱이 피어올랐답니다.”



 별장들이 입을 모아 증언했다.



 “맞네. 나도 벼락이 치는 줄 알았어.”



 만종이 그들의 말을 확인해 주었다. 아마도 화약 덩어리가 터진 것 같다고 판단한 건 도방의 한 장군이었다. 황과 숯, 초석(硝石)을 섞어서 만든 그 폭발 물질은 중국에서 주로 불꽃놀이에 사용되고 있는데 전쟁터에도 이따금씩 등장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외국 무역상에게서 그 물건을 구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상가를 쥐 잡듯이 뒤져 화약 취급하는 놈들을 모조리 붙잡아 들이라!”



 최항은 첩보원들을 동원해 포구 객관에 머무르는 외국인 상인들까지 밤샘조사를 시켰다. 하지만 범인들을 찾아내기는커녕 단서조차 잡아내지 못하게 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기는 줄곧 신음소리를 내는 최이나 만종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깨뼈를 깨버린 화살을 뽑아내고 응급치료를 하자 최이는 다리 감각이 없다고 호소했다. 허리 부상이 불러온 하반신 마비였다. 팔다리를 거의 쓸 수 없게 된 그에 비해 만종의 부상은 가벼운 편이었다. 부러진 오른팔 뼈만 붙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낸 자객들일까. 이쪽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만만찮은 상대임에는 틀림없었다. 전복 세력은 이쪽이 모르는 사이 위협적으로 자라나 있었다. 저들은 이쪽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파악하고서 주도면밀하게 일을 도모했다. 선원사에서 돌아오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급습하고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중국에서 들여왔을 화약이라는 신무기까지 들고서. 소수지만 그만큼 조직화됐다는 얘기다. 그 조직이 더 커지기 전에 뿌리를 캐내버려야 하는데 줄기는커녕 잎사귀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성대한 낙성식 이후 진양부에는 고심이 깊어만 갔다.





 도성 안의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폭염이 계속되었다. 낮잠을 자기 딱 좋은 여름날 오후, 어부 행색으로 변장한 태자는 내시 하나만을 데리고 경계가 느슨한 강화도 서쪽 창후리 포구로 나갔다. 둘은 미리 대기시켜 둔 고기잡이 배에 올랐다. 해안가 지리에 밝은 어부 하나가 타고 있었다. 그물과 낚시는 물론 물동이와 먹을 것까지 완벽하게 갖춘 그 배는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 바다를 빠져나가 북쪽으로 유유히 미끄러져 올라갔다. 작은 고깃배를 검수하는 군인들은 없었다.



 ‘태자 전하, 꼭 바다를 건너세요.’



 피폐해진 벽란도를 바라보면서 태자는 지밀 승정의 말을 떠올렸다. 갸름한 얼굴, 생각 많은 지밀 승정의 눈에는 이 모순덩어리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의지로 넘쳐났었다.



 ‘강도와 강도 밖 세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적들의 말발굽 아래서 처절하게 짓밟힌 육지는 생지옥이었으니까요. 이 섬 안에 갇혀서 누리는 소수자들의 평화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백성을 버리는 정치, 백성과 다투는 조정은 못난 조정입니다. 백성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밀 승정의 말은 태자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고려 조정이 버리고 온 육지의 백성들은 더 이상 고려의 백성이 아니었다. 몽골제국 황제의 백성이었다. 지금 아무도 모르게 그들 제국의 백성들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국제상선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예성강 포구는 낡은 어선들만 어지러이 뒤얽혀 있었다. 썩은 생선을 놓고 다투는 갈매기들의 울부짖음이 쇳소리보다 더 날카로웠다. 귀퉁이가 부서진 집들이 위태롭게 기대선 포구 마을에 어부를 남겨두고, 태자는 내시와 둘이서 옛 수도 개경 시내로 잠입했다.



김종록

일러스트=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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