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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만원씩 쓴 사람 수두룩" 요즘 직장인들 열광하는 건…

중앙일보 2012.01.14 00:00 종합 20면 지면보기
피규어 인터넷 동호회 ‘포매니아’ 회원인 이윤석씨가 정기모임에 가지고 온 리샤오룽(李小龍·이소룡) 피규어. 피규어 표정이 생전 그의 모습과 흡사하다. [안성식 기자]


복근엔 빨래판처럼 식스팩이 선명하다. 뱃가죽에 난 상처에선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좁혀진 미간도 실제와 판박이. 이윤석(37·유학 준비 중)씨가 가방에서 꺼낸 홍콩 영화배우 리샤오룽(李小龍·이소룡·1940~73) 피규어가 그랬다.

어른들, 인형에 빠지다
관절 움직이는 인형 ‘피규어’
성인팬 7만 여명



 “이게 피규어예요. 애들 장난감이 아니고, 진짜 피규어.”



 12일 오후 3시.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서 피규어 동호회 ‘포매니아’ 회원들의 정기모임(정모)이 열리고 있었다. 회장인 박재용(31·회사원)씨는 “피규어 모으는 데만 2000만원쯤 썼다”며 “나 같은 사람이 동호회에 흔하다”고 했다. 옆에서 피규어를 만지작거리던 조현기(31·회사원)씨도 거들었다.



‘포매니아’ 회원인 이윤석·조현기·박재용·서병훈씨(사진 왼쪽부터) 등이 12일 오후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 모였다. 이들은 소장하고 있는 피규어를 소개하며 “피규어는 애들 장난감이 아니라 예술작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안성식 기자]


 “어릴 땐 다들 일본 만화에 한번쯤 푹 빠지잖아요. 그 취미를 잃지 않고 지금껏 쭉 이어온 거죠. 이젠 이놈들 없으면 못 살아요.”



 대학원생 서병훈(28)씨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아예 작업실을 차려 놓고 직접 피규어를 만든다고 했다.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 성에 안 차더라고요. 우리 세대가 그래요. 즐기는 것도 ‘제대로’ ‘끝까지’ 하자는 거죠.”



 피규어의 매력에 푹 빠진 성인 매니어가 늘고 있다. ‘아이피규어(회원수 2만1000명)’ ‘포매니아(2000명)’ ‘액션피겨(4만6000명)’ 같은 인터넷 동호회 회원은 수만 명에 이른다. 매니어 차명수(58·회사원)씨는 “대학생부터 의사·펀드매니저 같은 고소득 전문직, 이승환·구준엽 같은 인기 연예인까지 성인 팬층이 두텁다”고 소개했다.



 피규어 가격은 수만원부터 수백만원까지 다양하다. ‘하비박스’ 같은 전문 구매 사이트나 ‘e베이’ 등 해외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구입하는 게 보통. 직거래를 하기도 한다. 이날 모인 회원들도 지금껏 1000만~3000만원씩 들여 피규어를 모았다. 박재용씨는 “제품이 비싸기 때문에 아무래도 30~40대 직장인들이 취미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며 “‘세트병(病)’(영화·만화 등 작품에 나온 캐릭터를 모두 모으는 것)에 걸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했다.



 매니어들이 꼽는 공통점은 80~90년대 일본 문화에 푹 빠진 ‘재팬 키드’(Japan Kid)였다는 것. 어렸을 적 일본 만화책·음악 CD를 구하기 위해 한번쯤 남대문·용산 상가를 뒤졌던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박씨는 “요즘 청소년들이 아이돌 가수에게 열광하듯 누구에게나 우상은 있기 마련”이라며 “피규어 매니어들은 우상을 멀리서 보는 게 아니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매니어들의 열정은 ‘피규어 한류’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저변은 좁지만 제작자들의 실력이 최상급이다. 정교하게 만든 인물 피규어는 머리카락·동공이 선명할 정도다. 피규어 제작사인 홍콩 ‘핫토이사’는 한국 매니어 사이에서 ‘명장’으로 통하는 홍진철(40)씨 등 제작자들을 스카우트했다.



서울대 곽금주(심리학) 교수는 “발달한 인터넷 환경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니 피규어 문화가 어느새 세계 일류 수준에 이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피규어 한류는 프로슈머(prosumer·생산적 소비자)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피규어(figure)=관절이 움직이도록 만들어 다양한 동작을 표현할 수 있는 인형. 소재는 만화 캐릭터부터 영화배우·가수 같은 유명인, 동식물 등 다양하다. 크기도 높이 8㎝부터 2m까지 천차만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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