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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hina Forum] 한중 수교 20년의 회고와 전망

온라인 중앙일보 2012.01.13 14:53
정종욱(鄭鍾旭) 동아대학교 석좌교수


-전략적 공진과 한중관계의 새 패러다임

(1)서론

수교 20년을 맞은 한중 관계는 거대한 변화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우리에게 어떤 이웃인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정하고 이에 따른 국가적 대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양국 관계도 그렇지만 주변의 상황도 급변하고 있다.

수교 후 20년 동안 빠른 속도로 늘어난 양국 간의 교류와 협력은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다. 경제협력의 틀이 바뀌고 정치 외교적 차원에서도 돌파구가 뚫려야 한다. 이제부터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며 양자 관계 못지않게 다자적 관계도 중요하게 되었다. 방향을 바로 잡지 않은 채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같은 속도로 달리게 되면 엄청난 파국이 올 수도 있다. 다자적 맥락을 외면한 채 양자 관계의 함정에 몰입하면 더 이상 나갈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중국이나 한국이 모두 금년 후반에 집권층을 교체하게 된다. 가을에 있을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는 제5세대 지도부가 등장한다. 예정된 행사이긴 하지만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새 지도자들의 성향뿐 아니라 앞으로 중국이 헤쳐나가야 할 국내외의 도전들을 고려하면 정책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연말에는 미국에서도 백악관의 주인이 결정된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다. 김정은 체제가 공식 등장했지만 근본적 정책의 변화 없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또한 예상보다 빠르게 북한에 밀착하고 있는 중국의 대북 포용정책이 과연 한중 관계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어떤 함의를 가질지도 우리 모두의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2) 회고

20년 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 못지않게 지난 20년 간의 양국 관계 발전 역시 역사적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역사적인 것은 앞으로 양국 관계 발전이 될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이라는 표현은 역사에 기록될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와 함께 역사의 분수령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역사의 분수령에서는 사건의 전과 후의 시기가 본질적 차이를 갖는다. 작동의 원리, 흔히 말하는 패러다임(paradigm)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교 전의 한중 관계 패러다임은 이념(ideology)이었다. 이념은 국가 간의 관계를 적과 동지의 관계로 단순화시켜 버림으로써 귀속감과 내부 단결을 극대화시킨다. 이웃 간에도 적과 동지의 관계가 있을 뿐이다. 한국과 중국 역시 서로 다른 이념 진영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류와 협력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채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에 서 있어야 했다. 중국이 탈이념적 실용주의 체제로 전환하면서 앙 국 간 교류와 협력이 간헐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본격적인 국교 정상화는 냉전 시대의 종언과 함께 이념의 벽이 완전히 무너진 후에야 가능했다.

수교 이전 시기의 패러다임이 이념이었다면 수교 20년 동안의 양자 관계의 작동 원리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였다. 수교 이후 양국 관계가 폭발적 팽창을 경험했던 것은 무엇보다 시장의 기능이 활발하게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기능주의적 논리에 따라 초기에는 중국의 비교적 저렴한 노동력과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된 가공무역 위주의 생산거점형 경협이 진행되었고 후반부터는 중국의 거대한 신흥 중산층을 겨냥한 시장개척형의 대형 투자가 주류를 이루어 가고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중국이 교역과 투자 면에서 한국의 최대 파트너가 된지도 벌써 8년이나 되었다. 이제 양국은 연간 3천억 달러의 무역 대국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인 자유무역지대(FTA) 구상이 결실을 맺게 되면 양국 간의 경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경협의 성장과 함께 비(非)경제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도 늘어났다. 사회·문화 분야에서는 2010년 기준으로 각기 6만 명이 넘는 유학생이 상대 국가에서 수학하고 있으며 연간 약 600만 명이 상호 방문했다. 정치·외교 분야에서는 정상의 교차 방문은 물론 환경, 보건, 문화, 교육, 과학, 기술 등 각료 차원의 업무 협의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약, 테러, 기후변화 등 비전통안보 영역에서의 협력도 활성화되었고 군사 부분에서도 인적 교류를 중심으로 협력이 이루어졌다. 군 고위당국자들 간의 교류가 정례화되었고 해군 함정의 예방과 정보 당국 간의 교류도 진행되고 있다. 지방 정부 차원에서의 교류도 빠르게 확산되어 한국의 거의 모든 지방 자치단체들은 중국의 성과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공관 수도 수교 초기에는 한 두 곳에 불과했던 중국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지금은 8개로 늘어났다. 한마디로 수교 이후 지난 20년 간의 양국 관계 발전은 세계사의 드문 기록으로 남을 만큼 긍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도 많았다. 동북공정을 둘러싼 역사적 갈등이 있었고 마늘 분쟁, 김치 분쟁, 올림픽 성화 사건, 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에 대한 시비,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과 폭력사태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로 때로는 양국 간 국민 감정이 악화되었고 심각한 외교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양국 간의 오랜 역사나 복잡한 지경학적 특성 그리고 수교 이후 가파르게 심화되어온 상호의존 관계에 비추어 보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긴 단절의 시간과 불신의 벽을 넘어서 이제 매일같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가는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일들이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문제들은 동시에 양국 관계가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전환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3)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전환기의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한 조치들이 강구되어야 한다. 정부 간 현안 문제 중심으로 효율적 소통과 실질적 협력 채널을 더욱 강화하고 지방 정부 간 형식적 방문을 지양하고 맞춤형 교류와 협력을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민간차원에서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아직도 양국 간에는 서로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낮을 뿐 아니라 불신과 오해에서 생기는 불행한 일들이 적지 않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정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의 공공외교와 문화외교를 강화하여 상호 신뢰구축에 힘써야 한다. 청소년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고 각계 민간 전문가 집단들의 상호 교류에 더 많은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환기에 진입하고 있는 양국관계를 관리하고 추동할 적절한 패러다임이 없다는 점이다. 기능주의적 패러다임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정치· 외교· 안보 등 국가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영역에서 양국 간에 협력의 기초가 되고 현안 문제에 대한 해법 모색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야 한다.

기능주의의 시기 동안 양자관계의 대표적 담론은 구동존이(求同存異)이었다. 서로 입장이 같으면 협력하지만 이견이 있으면 협의의 대상에서 배제됐다. 기능주의적 담론에서 순기능적인 것만 수용하고 역기능적인 것은 제외함으로써 양자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수교 후 얼마 동안은 이런 방식이 통했지만 기능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그 한계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양국 관계가 전략적 영역으로 옮겨 가면서 특히 심각해졌다. 그래서 구동존이(求同存異) 대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입장이 달라 합의하지 못하면, 왜 입장이 다르며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논의라도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구동존이이든 화이부동이든 모두 현상유지를 전제로 한 기능주의적 담론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능주의적 한계를 넘어 수교 20년 이후의 양국 관계를 추동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전략적 공진(戰略的 共進 strategic co-evolution)이 되어야 한다. 전략적 공진은 양국이 지역 문제와 다자 관계를 포함하여 각기 상이한 전략적 이해와 관심 사항들을 함께 협의하고 협력하고 이를 통해 보다 높은 단계를 향해 함께 진화해 나가는 탈기능적 사고와 현상타파적 자세를 말한다. 갈등이 없는 분야에서는 협력의 영역을 넓혀가는 동시에 갈등이 있는 분야를 찾아내서 문제를 해결하고 해야 할 일은 하는 존동구이(存同求異)와 유소작위(有所作爲)적 사고를 전제한다.

물론 그간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노력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지난 2008년 5월 이명박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이 양국 관계를 전면적 교류협력단계에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양국 관계가 기능주의적 교류 협력의 단계를 넘어 전략적 협력의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는 선언적 성격이 강했을 뿐 구체적 내용을 담은 양국 관계의 새로운 비전이나 실천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정상회담 이후 양국 간에 민간 차원의 전문가 위원회와 정부 차원의 차관급 전략대화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은 문제를 제기하고 가능성을 모색하는 담론적 모색의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략적 협력이 정착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양자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체제 외적 요인들 때문이다. 양국이 제3자와 맺고 있는 전략적 제휴 관계가 특히 그러하다. 이들 체제 외적 변수를 어떻게 양자 관계 속으로 수용하고 조화시키느냐가 앞으로 한중 관계가 풀어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한중 관계에서 이들 체제외적 변수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에 대한 제도적 협력이 가능할 때 양국 관계의 작동원리로서 전략적 공진주의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며 한중 관계에도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4)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

한중 관계가 전략적 공진의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 풀어야 할 구체적 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북한과 미국이다. 중국의 경우 북한에 대한 전략적 배려가 한중 관계 발전의 최대 변수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미 동맹관계가 그렇다. 따라서 한중 관계의 전략적 공진을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를 한중 관계 속에 적절히 접목시켜야 한다. 한중 관계가 북중 관계, 한미 관계와 함께 진화할 수 있게 만들지 않는 한 한중 관계의 발전은 물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도 기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에 대한 해법으로 연미연중(聯美聯中), 연미화중(聯美和中), 결미연중(結美聯中) 연미통중(聯美通中) 등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모두와 서로 협력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이 동맹과 동반자의 틈새에서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고 전략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냉전 시기의 미국과 소련의 관계에 비하면 현재의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상호 교류와 협력의 측면이 훨씬 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고민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두 강국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경우라면 어느 한쪽을 택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냉전 시대의 한국의 선택은 단순했다. 그러나 지금은 양쪽 다 한국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파트너이다. 미국은 우리의 안보를 확고히 해주는 동맹국이자 오랜 세월을 통해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밀접한 관계를 쌓아온 특수한 국가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는 경제 협력뿐 아니라 정치 안보 분야에서도 이해 상관자적 관계가 점차 깊어지고 있다. 그런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상호 불신의 골이 깊이 파여져 있고 전략적 이해관계도 충돌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자신의 부상을 견제하고 봉쇄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갖고 있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의 부상이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시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벌써 오래된 논쟁거리이지만 우리에게는 국가적 명운과 직결되는 21세기 최대의 현안 문제이다.

미국과의 동맹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열려있는 선택의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미중 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는 않다. 균형자나 조정자의 역할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당사자들로부터 오해와 불만을 자초할 수 있다. 결국 해답은 양자 및 다자적 협력 체제를 강화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만의 독자적 영역을 만들고 이를 점차 넓혀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상대방의 핵심 이익과 직접 충돌되는 부분을 줄이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이후 한국이 가졌던 중국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나 주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미사일 방어 체제를 둘러싼 중국의 불편한 태도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의 민감한 전략적 이해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자세도 가져야 한다. 창의적 도전과 정확한 판단 그리고 전략적 인내가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한미 한중 그리고 미중 관계가 다 같이 전략적 공진에 성공할 수 있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과 북중 관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5) 북중 관계와 한중 관계

중국의 대북 정책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풀어볼 수 있다. 첫째는 부상 외교적 측면이다. 3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진 중국의 부상은 중국 외교에서 핵심적 국가이익이다. 개혁 개방을 통해 경제의 지속성장이 가능하도록 대외관계를 관리하는 것이 중국 외교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반도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하면 중국의 경제 성장이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반드시 북한의 행동이 좋고 찬성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중국의 핵심적 국가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중국 외교의 기본방향은 적어도 앞으로 10년 동안은 크게 변하지 않을 전망이다. 중국은 2020년까지 전면적 소강 수준의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전면적 소강 수준의 경제 발전은 사실상 부상의 완결을 뜻하다. 금년 가을 등장해서 2022년까지 집권하게 될 제5세대 지도부가 마무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국가목표이다.

둘째는 전통적 관계의 시각이다. 중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라 부른다. 중국이 전통적 관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나라는 북한 밖에 없다.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최고의 관계는 혈맹이지만 그런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는 중국에게 북한이 최고의 위상과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런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건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강도가 약해지긴 했지만 그런 전통을 대를 이어 전해 내려가게 하자(世代相傳)는 것이 2010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함께 발표한 담화문의 내용이었다. 좀 더 구체적인 표현도 나왔다. “중국 공산당은 북한과의 관계를 고도로 중시하고 노동당의 새로운 영도집체와 함께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각 영역에서 교류와 협력을 적극 추진한다.” 제3차 노동당 대표자 대회에서 김정은이 후계자로 추대된 며칠 후 베이징을 방문한 최태복 노동당 비서에게 후진타오 주석이 한 말이다. 북중 간의 전통적 우호협력관계가 김정은 시대에도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

셋째는 지정학적 시각이다.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북한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안보적 가치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중국과 북한은 휴전선의 5배가 넘는 국경선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국경의 대부분은 완만한 구릉이나 낮은 강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건너 다닐 수 있다. 티베트나 신장 같은 곳과는 다르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편에는 제12차 5개년 경제사회발전규획에서 중국 정부가 신흥 산업벨트로 개발하고 있는 동북 3성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족 소수민족 자치주도 있다. 군사적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운 지대일 뿐 아니라 일단 유사시에는 수 많은 북한 난민들이 몰려와서 동족인 조선족들과 어울리면 매우 복잡한 정치·사회적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요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안보 취약지대일 수밖에 없다.

북한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여 한반도 통일이 실현되면 남한 정부가 그것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중국에 대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더 높아진다. 남한 주도의 통일 이후 한국 정부가 중국에 우호적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재 한국과 미국 간의 군사동맹을 고려하면 한국이 주도하는 한반도 통일은 곧 중국이 미국의 군사력과 직접 대치하는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국의 전략적 판단이다. 북한의 유사사태가 단순한 전략적 요충의 상실뿐 아니라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과 직접 대치하는 최악의 안보 딜레마를 초래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웬만한 경제적·외교적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을 우호적인 이웃으로 존속시키는 것이 최상의 전략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중국의 안보 전략이 반드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역행하거나 한중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역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최우선의 국가이익으로 간주하고 있고 이것이 한국과 중국이 전략적 공진을 모색하는 최소한의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다. 과거에도 중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고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면서도 북한의 과도한 도발행위를 억제함으로써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나름대로 기여했었다. 또한 한국과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으며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2003년 봄 북한의 우라늄 농축 계획을 둘러쌓고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북한에 대해 회유와 억제의 양면책을 구사하여 6자회담을 성사시키고 9.15 합의와 2.13 합의 등 한반도 비핵화의 이정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큰 기여를 한 게 바로 중국이었다. 2006년 북한의 핵 실험 후 핵 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에 미묘한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에서 핵무기의 위협을 제거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한중 간의 협력이 이런 중국의 한반도 정책을 고려해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6) 한국의 선택

북한에서는 지금 세기적 변혁이 진행 중이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가 빠르게 정착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선군정치가 이미 김정은 시대의 북한의 통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선대의 유업 때문이 아니라도 체제 내부의 불만이나 취약성을 배출시키는 수단으로 대남 강경 전략을 선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북한이 쉽게 핵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핵 협상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정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략적 불확실성을 줄이고 남북 간에 군사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단기적 시각에서 본 최우선 목표가 된다. 보다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점차 개혁·개방의 길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북한 핵 문제 해결의 현실적 방안이 될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지난 4년간 이명박 정부의 불필요하게 경직된 대북 정책을 보다 유연하게 바꿀 필요도 있다. 적어도 북한의 대남 강경책이 정당화될 수 있는 구실은 주지 말아야 한다. 정책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행동과 말은 유연할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독자적 활동 공간이 생길 수 있다. 또한 한반도에서 중국의 협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역사적 대전환기에 접어든 한반도 내외의 변화가 전략적 공진으로 나가게 할 수 있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한중 관계가 수교 20년을 넘어 더욱 순항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가 북한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양자 차원을 넘어 다자 관계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주변국들 간에 군사적 신뢰 구축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하며 영토문제 등과 관련해서 분쟁예방외교도 활발히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한·중·일 3국 간의 협력도 보다 제도화시킬 필요가 있다. 지난해 출범한 3국 협력 사무국의 기능을 강화해서 점차 아세안의 수준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또한 한·중·일 3국간의 자유무역지대 구상도 빠른 시일 내에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북한에서 생겨난 전략적 기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주변국가들과 긴밀한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중국 정부와 그런 체제가 구축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노력의 성공 여부에 한중 관계의 미래가 달려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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