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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22> 곰배령

중앙일보 2012.01.13 04:27 Week& 4면 지면보기
1 곰배령 정상, 구름이 눈 깜짝하는 사이 걷혔다. 별안간 시야가 넓어져 보이지 않던 눈꽃나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지마다 복스럽게 달라붙은 눈꽃, 북실북실한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앙상한 겨울나무를 휘감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따스함까지 느껴지는 곰배령 풍경이었다. 뺨을 때리는 듯한 칼바람이 지나갔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요한 아이보리 빛 설국에 홀려 한참을 서 있었다.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



설피 신고 설국으로 … 눈꽃 나무들 수줍게 얼굴 내밀다

강원도 인제 곰배령은 오지 중의 오지다.



봄에는 약초와 산나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여름엔 희귀한 야생화가 군락을 이룬다. 가을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빛깔의 단풍이 드는 천혜의 생태 관광지가 된다.그래서 곰배령 앞에는 늘 ‘천상의 화원’이란 상용어구가 붙는다.



이 천상의 화원에는 겨울에도 꽃이 핀다. 눈꽃이다. 곰배령 들머리에 진동2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다른 이름이 ‘설피마을’이다.



설피는 우리 고유 방식으로 만든 눈신발이다. 눈신발을 신어야 겨울 곰배령에 들 수 있을 만큼, 곰배령에는 눈이 많다. 그래서 겨울 곰배령 가는 길은 눈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곰배령을 걸었다. 아니, 겨울을 걸었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2 곰배령 정상을 가리키는 이정표. 3 지난해 12월 곰배령 강선마을에는 2m가 넘는 눈이 내렸다. 강선마을을 지나는 길 옆으로 쌓여 있는 눈이 어마어마하다. 4 눈신발, 설피를 신자 신기하게도 무릎까지 빠지던 눈이 발등 높이까지만 올라왔다. 5 설피마을 초입에 있는 진동분교. 오지마을에 어울리는 아담한 모습이었다. 6 강선리 염기영 할아버지 창고에 먹이를 먹으러 내려온 새끼 멧돼지.




# 곰배령 가는 길



곰배령은 정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자동차로 곰배령 입구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강원도 인제군 진동1리에 들어서자 산세가 험해지고 길이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뾰족한 봉우리가 겹겹으로 하늘을 가린 산길을 자동차는 힘겨워하며 기어 올랐다. 진동2리 설피마을 입구에서부터 트레킹 시작점인 점봉산 생태관리센터까지 찻길은 아예 10㎝가 넘는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도로 옆에는 눈이 가드레일 높이만큼 쌓여 있었다. 도로 옆을 흐르는 계곡물은 꽁꽁 얼어 있었다.



 곰배령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 두메산골이었다. 2002년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다는 ‘강선마을’을 품고 있다. 겨울에 얼마나 오고 가기가 힘들었으면 동네 이름을 ‘설피’에서 따왔을까.



 설피마을 초입엔 아담한 크기의 진동분교가 있다. 현재 학생 수는 다섯 명. 몇 차례 폐교 위기를 넘기고 지금까지 설피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진동분교는 1995년 한 번 폐교될 뻔했다. 그때 1년 분교 운영비가 6000만원이었는데, 이 돈이 부담스럽다고 교육 당국이 학교 문을 닫으려고 했다. 마을 주민은 그때 유일한 재학생이었던 마정아(25·당시 8세)씨를 데리고 교육청 앞에서 집단시위를 벌여 학교를 지켰다. 99년 또다시 폐교 위기가 있었을 때도 동네 주민은 기지를 발휘해 학교를 살렸다. 그때 일곱 살이었던 홍꽃님(20)양을 서울 친척집으로 보내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뒤 진동분교로 전학을 오게 했다.



 산짐승도 수시로 출몰하는 모양이었다. 길옆의 논밭에는 멧돼지·토끼·고라니 등 야생동물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겨울 곰배령에서 모든 생명은 구분이 없어 보였다. 강선마을에 30년째 살고 있다는 염기영(78) 할아버지가 창고에 사료를 놓아두며 말했다.



 “한 달 전부터 새끼 멧돼지 두 마리가 마을로 내려와서 창고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잖아. 그래서 아예 그놈들 먹으라고 사료를 놔뒀어. 먹을 것 없는 겨울인데, 사람이고 짐승이고 같이 살아야지.”



 길은 얼음이 깔려 있고, 집마다 은빛 이불을 뒤집어쓴 마을. 몇 안 되는 동네 주민이 똘똘 뭉쳐 학교를 지켜내는 마을. 멧돼지에게 피해를 당하면서도 먹이를 준비하는 할아버지. 곰배령 가는 길은 이상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처럼 낯설었다.



 # 눈 세상 안으로



곰배령 눈꽃 트레킹은 점봉산 생태관리센터에서 시작했다. 여기서 예약해놓은 입산 허가증을 받았다. 생태관리센터, 강선마을을 지나 곰배령 정상까지 5km, 왕복 네시간이면 충분하다. 고개가 나지막하고 험한 길이 없어 초보자도 쉽게 즐길 수 있다.



 강선마을을 지나고 약 50분간 계곡을 따라 좁은 길을 걸었다. 다른 계절 같았으면 까치박달·고로쇠나무·전나무·피나무 등 우리나라 식물 서식종의 20%에 해당한다는 점봉산의 다양한 나무가 눈길을 끌었겠지만, 소복이 내린 눈은 모든 자연의 풍광을 덮어버렸다. 눈 무게를 못 이기고 꺾여버린 나무의 누런 속살이 자꾸 눈에 밟혔다. 곰배령에는 이번 겨울 2m가 넘는 눈이 내렸다고 했다.



 정상을 1.3㎞ 남기고 쉼터가 나왔다. 곰배령 입구였다. 눈송이가 앙상한 나뭇가지에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 한쪽 방향으로 쏠린 눈꽃은 지난밤 곰배령을 지나간 눈바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겨울 곰배령이 좋은 이유는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휘파람 소리 내며 지나가는 바람소리,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간혹 산짐승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탐방로 따라 눈을 치워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탐방로에서도 발이 푹푹 빠졌다. 준비해온 설피를 꺼내 신었다. 전통적으로 설피는 물푸레나무와 소가죽으로 만들었다. 물푸레나무로 테두리를 잡고 질긴 소가죽을 이용해 격자 모양으로 묶어 지탱했다. 요즘은 다래나무와 짚으로 대신한다. 난생 처음 보는 설피를 신으려 씨름할 때만 하더라도 긴가민가했다. 설피를 신고 눈밭에 발을 디뎠다. 신기하게도 무릎까지 빠지던 눈이 발등 높이까지만 올라오다 멈췄다.



 외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곰배령 정상에 올랐다. 기상 상황이 분 단위로 바뀌었다. 잿빛 눈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가시거리가 10m도 안 되다가도 별안간 파란 하늘이 열렸다. 시야가 넓어지자 눈꽃 나무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점봉산 줄기가 수줍게 얼굴을 보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구름 사이를 비집고 반짝 빛이 내리쬐자 곰배령은 온통 아이보리 빛에 휩싸였다. 아! 설국, 설국이었다.







●길 정보   곰배령에 들어가려면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홈페이지(supannae.forest.go.kr)에서 입산 신고를 해야 한다.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돼 입산객을 하루 2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2월 말까지는 동절기로 입산 시간이 오전 10시와 11시 두 차례로 한정된다. 폭설이 내리면 아예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점봉산 생태관리센터에 수시로 문의해야 한다. 외길이라 길 잃을 염려도 없고, 곰배령 정상 직전 20분 정도만 경사가 있을 뿐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평탄하다. 그래도 아이젠·스패츠 등 겨울 산행 장비는 꼭 챙겨야 한다. 방한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간식과 물도 필요하다. 눈 내린 산에서는 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걷기여행 전문여행사 승우여행사(swtour.co.kr)가 오는 14·28일, 2월 5·11·12일 등 다섯 차례 ‘곰배령 눈꽃 트레킹’을 떠난다. 4만5000원. 02-720-8311.



이번 달 ‘그 길 속 그 이야기’에서 소개한 ‘곰배령 눈꽃 트레킹’ 영상을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와 중앙일보 아이패드 전용 앱, 프로스펙스 홈페이지(www.prospecs.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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