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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나] “내가 보낸 색연필로 제2의 피카소 나올지 모르잖아요”

중앙일보 2012.01.12 09:00 Week& 6면 지면보기
지난 12월 2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서울국제고등학교의 여학생기숙사. 겨울방학을 맞아 썰렁하던 이곳 복도가 갑자기 부산해졌다. 모처럼 기숙사에 들른 2학년 임주원(17)양이 자신의 방 앞에 쌓여있던 택배 상자들 때문에 끙끙대고 있었던 것이다.


중고 학용품 기증운동 펼치는 여고생 임주원양

 “상자 옮기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앳된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임양이 건넨 첫 마디다. 크고 작은 상자 속에는 전국에서 보내온 펜·공책·크레파스 등의 중고 학용품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간혹 새 학용품이 섞여 있기도 했다. 임양은 같은 학교 친구 이예원(18)양과 함께 ‘호펜(HOPEN)’이라는 이름으로 중고 학용품을 모아 필리핀·몽골·캄보디아 등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중고학용품을 모아 필리핀?몽골의 아이들에게 보내고 있는 임주원양이 전국에서 보내온 학용품 꾸러미 앞에서 환하게 웃고있다. [김경록 기자]


 호펜은 ‘HOPE AND PEN’을 줄여 만든 이름으로, ‘펜으로 희망을 키우다’라는 의미다. 임양은 “우리가 보낸 색연필·파스텔을 받은 아이들이 제2의 피카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한국에서 보내준 학용품으로 공부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수상소감 발표하는 걸 꿈꾸기도 하고요”라고 말했다.



 호펜 활동을 시작한 건 임양이 서울 개운중학교 3학년이던 2009년 11월. 『히말라야 도서관』이라는 책을 읽고 자극을 받았단다. 마이크로소프트사 등에서 경영전문가로 일했던 존 우드가 자선사업가로 변신, 네팔 등 저개발국가에 도서관을 세우고 책을 기증하게 된 경험담을 쓴 책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면 생각만 하지 마라. 뛰어들어라’는 구절이 머리를 맴돌더라고요. 나도 누군가를 돕고 싶다고 고민하다가 책상 위에 쓰지 않고 내버려둔 학용품들을 발견하게 됐어요. 멀쩡한 그 학용품들을 차라리 세계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눠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임양은 우선 친구들과 함께 학교와 학원 등에서 학용품을 수거해 잘 손질했다. 하지만 해외로 전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히말라야 도서관』의 저자인 우드에게 ‘네팔로 중고 학용품을 보내고 싶으니 운송료를 보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가 ‘현지에서 구입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답장을 받고 실망하기도 했다. 국내의 복지재단 여러 곳에도 연락해 봤지만 ‘중고라서 안 된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답을 받았다. “펜이나 필통 상태도 하나하나 신경을 쓰는데 어른들이 몰라 주는 것 같아 서운했어요. 그럴수록 학생답게 더 잘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죠.”



 다행히 2010년 4월 필리핀 세부에 있는 학교로 해외봉사를 가는 부모님 지인을 통해 처음으로 10kg의 학용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서울국제고 해외봉사단, 지구촌교회 의료봉사단 등과 연락이 닿아 2010년 한 해 필리핀·캄보디아·인도에 학용품 75kg을, 네팔에 중고 영문도서 203권을 보냈다. 그해 10월부터는 블로그(blog.naver.com/hopenproject)를 만들어 학용품 수집 범위를 전국으로 넓혔다. 지난해 1월까지 2차 프로젝트를 통해 모은 303kg의 학용품은 여러 해외봉사단을 통해 네팔·몽골 등 8개 나라에 전달했다.



 임양이 뿌린 호펜의 씨앗은 전국에 퍼지고 있다. 다른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서 동참하고 싶다는 연락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2010년 11월 충주여고에 호펜 2호점이 생긴 이후, 전국에 18호점까지 생겼다. “분점 신청서를 받으면 열정과 성실함을 확인해서 승인해줘요. 그 다음엔 호펜 활동에 관한 매뉴얼을 줘서 독립적인 활동을 하게 하죠.” 8호점 대표인 원동현(18·경기 부천북고 2)군은 “지난해 7월 분점 승인을 받고 28명의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전교생 대상으로 4개월 동안 학용품 15kg을 모았어요. 라오스로 떠나는 대학생 해외봉사단에 학용품을 전달했죠”라고 말했다.



 올해 3학년이 되는 임양은 공부와 호펜 활동을 병행할 생각에 사실 부담도 느낀다. “그래도 제가 호펜을 만들었으니 주인의식과 책임감이 느껴져요. 뭐든 처음 시작할 때 두려움이 따르지만 도전하고 나면 어렵지 않아요. 실천이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올 겨울 3차 프로젝트의 수집기간은 오는 31일까지다. “볼펜이나 사인펜은 잉크가 충분히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헝겊 필통은 세탁해서 보내주세요.” 임양이 또 한번 생글거리며 당부했다.



윤새별 행복동행 기자





“중고 학용품 보내주세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1가 1-27 110-521



서울국제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실 호펜지기 임주원 앞 ▶문의=blog.naver.com/hopen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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