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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은 싫다 … 베이징 출셋길 버리고 ‘지방 대장정’ 25년

중앙일보 2012.01.12 03:00 종합 12면 지면보기
2002년 저장성 당서기로 부임한 시진핑(오른쪽)이 상수원 건설 현장을 찾아 근로자와 악수하고 있다. [중국 포털 바이두, 정딩현=장세정 특파원]


지난해 12월 12일 중국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시진핑(習近平·59) 중국 국가부주석이 1982~85년 부서기·서기를 지낸 이곳 기차역을 나서자 대로변 좌우에 거대한 쇼핑타운이 펼쳐졌다. 쇼핑타운은 사방으로 수백m 늘어서 있었다. ‘정딩 국제 소상품(小商品)시장’이다. 시골 장터를 연상하면 오산이다. 2000년대 초반에 20만㎡(연면적) 규모로 시작해 지금은 148만㎡나 된다. 가전용품 점포를 운영하는 자오(趙·여)씨는 “농촌에 대규모 일용품 시장을 만들도록 해준 시진핑이 대단하다”며 “수많은 일자리가 생겨 주민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다.

‘시진핑의 길’에서 한·중관계 미래를 묻다 ② 풍부한 풀뿌리 행정 경험



시진핑이 서기를 지낸 정딩현(허베이성)의 ‘국제 소상품 시장’. 시진핑이 시장 건설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중국 포털 바이두, 정딩현=장세정 특파원]
중국 허베이성 정딩현은 시진핑 부주석이 “제2의 고향”이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삼국지 조자룡(趙子龍)의 고향이기도 하다. 저장성 당서기 때 정딩현의 발전을 꾀한 것은 25년에 걸친 지방관으로서의 첫발을 이곳에서 내디뎠기 때문인 듯하다. 시진핑은 1982년 3월 베이징을 버리고 정딩현을 택했다. 79년 칭화(淸華)대를 졸업한 그는 베이징의 당중앙 군사위원회에서 현역 군인으로 약 3년간 복무했다. 자원 입대였다. 이 기간 군사위원회 비서장과 국방부장을 지낸 겅뱌오(耿飇)의 비서를 지냈다. 그는 출세가 보장된 자리를 3년 만에 내던지고 정딩현의 일선 행정 현장을 택했다. 온실을 박찬 것이다. 그러곤 단계를 밟아 최고 권력을 향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현지에서 만난 50대 후반 택시기사 류(劉)씨는 “시진핑은 낡은 군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며 “직원이나 주민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식사를 자주 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전했다. 스스로를 낮추는 처신을 했다는 것이다.



시진핑의 제안으로 세워진 정딩현의 명·청 시대 건축물 룽궈푸(榮國府). [중국 포털 바이두, 정딩현=장세정 특파원]
 시진핑은 이곳에서 두 가지 소신 행정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는 농업 문제다. 농업 위주였던 정딩현 농민의 연간 식량 매상 할당량은 3만5000t었는데, 시진핑이 중앙정부에 건의해 2만5000t으로 줄였다고 한다. 중앙정부에 지방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해 주장을 관철시킨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광산업 도입이다. 농촌 정딩현의 파격적 실험이었다. 시진핑은 정딩현이 고도(古都)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는 중국중앙방송(CC-TV)이 사극 ‘홍루몽(紅樓夢)’ 촬영장을 물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명·청 시대의 건축물인 룽궈푸(榮國府)를 짓자고 제안했다. 2만4000㎡ 땅에 4600㎡의 옛 건축물을 짓는 데 350만 위안(약 6억3000만원)이 필요했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농촌으로선 부담이 큰 프로젝트였다. 당시 공무원들은 “승산도 없는 사업에 예산만 낭비한다”고 반대했지만 시진핑은 밀어붙였다. 시진핑이 정딩현을 떠난 86년 8월 룽궈푸 완공 후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이를 통해 시진핑은 행정에 비즈니스 마인드를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룽궈푸 관광안내센터에서 만난 가이드 왕닝(王寧)은 “룽궈푸가 ‘홍루몽’뿐 아니라 ‘포청천’ ‘강희황제’의 촬영장이 되면서 정딩현은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했다”고 말했다. 룽궈푸 인근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장위메이(張玉梅)는 “시진핑은 재임 기간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친민(親民) 행정을 펼쳤다”며 “그가 중국 국가주석이 되는 것을 정말로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 시기 시진핑의 활약상은 소설 『샛별(新星)』로 그려졌고,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시진핑은 85년 푸젠(福建)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만과 마주한 샤먼(廈門)시 부서기→닝더(寧德)시 서기→푸저우(福州)시 서기→푸젠성장으로 한 단계씩 승진을 거듭했다. 장장 17년간의 푸젠성 생활이었다. 행정가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는 이곳에서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닷가 어촌인 닝더시 서기 땐 초가집을 현대식 주택으로 개조하고, 수상 거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켰다. 그 조치는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닝더의 어촌마을 아오장(鰲江)촌에서 만난 40대 어민 롄(連)씨는 “시진핑은 88년부터 2년간 아오장촌의 1000가구(약 4000명)가 육지에서 살 수 있도록 집을 지어줬다”고 말했다. 닝더는 푸젠성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주민들의 기초 생활 여건을 개선한 그의 방식이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킨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닝더 일대는 지금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 2009년 고속철도가 개통됐고, 대규모 역사가 지어졌다. 중국과학원 닝더 신도시 종합개혁 시범구, 중국항공우주그룹 산하 로켓연구원의 하이시(海西) 대형 풍력발전기 제조기지, 해협(海峽)식품산업파크, 닝더 마이크로소프트(MS)기술센터도 들어설 예정이다. 닝더의 천지개벽이다. 시진핑에게도 시행착오가 없진 않았다. 무리한 도심 재개발 사업과 국제공항 건설 사업 등이었다.



 시진핑은 푸젠성 경험을 바탕으로 2002년 ‘민간경제 대성(大省)’으로 불리는 저장(浙江)성 당서기로 파격 발탁돼 약 5년을 일했고, 2007년 상하이(上海) 당서기가 되면서 차기 주자로 급부상했다.



도시·농촌을 오간 시진핑의 실사구시 행보는 향후 한·중 관계가 중앙정부를 넘어 지방의 풀뿌리 차원으로 확대·발전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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