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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고전주의자 서예작가 3인 … 갑골로 돌아가 전위를 보여주다

중앙일보 2012.01.12 00:00 종합 27면 지면보기
정도준의 ‘공덕(功德)’. 2007년 작. ‘허물이 없으면 그게 바로 성공, 원망이 없다면 이게 바로 덕’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문자예술인 서예는 말은 물론 글자 내용과 조형을 동시에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그림과 달리 글씨에서 시대상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다들 시대미란 ‘전위(前衛)’라는 이름으로 문자를 해체해야만 발현되는 걸로 오해한다.


- 파주 헤이리 ‘서예삼협파주대전’을 보고

 허나 역사에서 당대는 늘 전위였다. 그래서 왕희지(王羲之·307~365)와 김생(金生·711∼?) 같은 이가 시공을 초월해 거론된다. 고전보다 더 급진적인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석(何石) 박원규(65), 학정(鶴亭) 이돈흥(65), 소헌(紹軒) 정도준(64)은 골수 고전주의자, 곧 전위다. ‘서예삼협파주대전’에서 맞닥뜨린 세 작가는 각체를 두루 겸하면서도 갑골문·종정문((鐘鼎文·옛 제의에서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 같은 옛 전서(古篆)의 재해석을 화두로 삼아왔다.



 이들의 돌파지점은 삼인삼색. 하석은 ‘불광불급(不狂不及)’에서 보듯 고전(古篆)이나 전각에서 배태된 도법적(刀法的) 필획으로 행초(行草)와 문자추상까지도 담아낸다. 소헌은 갑골 종정글씨 자체를 행초 필획과 혼융해낸다. ‘공덕(功德)’ 같이 필획의 곡직(曲直) 장단이나 먹의 농담 등 대비적인 음양요소를 극단적으로 구사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공간을 경영하고 있다. 이점에서 소헌의 글씨는 그림 너머에 있다.



 반면 학정은 행초를 전형으로 전예로 거슬러 해석해내거나 급기야는 먹을 뿌린 ‘매화’로 서화(書畵)가 본래 하나임을 실천해내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건 서예사에서 갑골·종정 같은 그림문자가 지금만큼 왕성하게 재해석된 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파주대전이 20세기 한국 서단의 공모전과 서숙(書塾·글방)의 질곡에서 벗어나 21세기 서예사를 새로 ‘쓰는’ 전쟁터라는 증거다. 예컨대 추사가 왕희지와 그 이전의 서한예서로 첩(帖)과 비(碑)를 혼융해냈다면 이들은 여기에 더하여 글씨의 시원인 신성(神聖) 문자로 거슬러 가서 고전을 불러낸다.



 오늘날 문자·영상 시대에 애초 문자와 영상이 한 몸인 갑골·종정 같은 고전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시대 첩(帖)·비(碑) 혼융의 새로운 글씨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파주대전의 삼협은 한바탕 필묵유희(筆墨遊戱)로 지필묵이 사라진, 사실상 한자(漢字) 문맹인 이 시대야말로 서예가 모든 예술의 토대이자 궁극 아닌가를 새삼 묻고 있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서예삼협파주대전=2월 29일까지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 북하우스, 갤러리 한길 전관. 무료. 031-955-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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