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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왜 얼굴이 안 보일까

중앙일보 2012.01.12 00:00 종합 33면 지면보기
김기택
시인
친구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한 중학생 권군의 사연이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죽음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나에겐 공통점이 보인다.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교내 폭력이 원인이었고, 병사에 이르게 한 것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한 모진 고문이 원인이었다. 저항할 힘이 없는 이에게 가해진 가혹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두 죽음은 타살이나 마찬가지다.



 한 죽음은 폭력이 권군의 손을 빌려 스스로 죽게 했을 뿐이지 폭력이 죽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른 죽음도 고문 후유증으로 수십 년에 나뉘어 매일 조금씩 죽은 것이므로 폭력이 죽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앞의 경우는 고통이 한 번에 끝났지만, 뒤의 경우는 고통이 수십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더욱 끔찍했다. 김근태 고문은 고문 후유증으로 몸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고통의 기억으로 행복과 여유가 죽었으며, 불면으로 잠이 죽었다. 그러므로 폭력은 한 사람을 수십 년간 수백, 수천 번 죽인 셈이 된다.



[일러스트=백두리]


 나도 성장기에 폭력에 시달린 적이 있다. 매를 맞는 순간의 아픔은 감전되거나 뼈가 부러지는 것같이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이를 악물면 견딜 만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폭력이 늘 내 근처에 있다는 두려움과 언제 맞을지 몰라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내 눈은 끊임없이 눈치를 보았으며, 아무 일이 없는데도 가슴이 쿵쿵 뛰었으며, 입이 웃을 때조차 마음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다행히 나에게 시가 찾아왔다. 시를 쓰면서 현실을 허구로 만들어 내 삶을 바꾸어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이미지로 만들어 남의 것인 양 바라보기도 했다. 시에서는 꼽추 노인이나 절름발이가 되어 치욕을 당해도 쥐와 닭이 되어 잔인하게 죽어도 얼마든지 여유를 가지고 내 고통을 볼 수 있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 즐거움도 타인으로부터 오고 괴로움도 타인으로부터 온다. 타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타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은 나에게 ‘얼굴’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얼굴은 상처받을 가능성이며 외부적인 힘에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얼굴의 무저항성에는 ‘살생하지 말라’는 요구가 씌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얼굴은 타인을 주인으로 모시라는 도덕적인 명령이며 윤리적인 호소라는 것이다(강영안, 『타인의 얼굴』). 얼굴은 우리가 다 읽을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곳이다. 상대방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질 때 표정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들어 있는지 잘 느낄 수 있다. 얼굴을 보지 않을 때, 얼굴이 하는 진정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 폭력은 쉽게 나온다.



 지금 우리 교육 현장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경쟁에서 이기는 법이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영어 단어 하나, 수학 공식 하나라도 더 쳐다봐야지 친구들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된다. 부모는 돈과 학원과 좋은 대학을 쳐다봐야지 자녀들 얼굴 볼 겨를이 없다. 사회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먹고사는 일, 편 가르기 등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공간은 얼굴이 없기에 더 폭력적이 될 수 있다.



 우리 국민의 교육 수준은 높아지는데 정작 사회는 더 무지해지는 것 같다. 단지 머리에 든 게 없다고 무지한 것인가? 타인의 얼굴에서 나를 보고 인간의 연약함을 보고 윤리적인 요구를 듣지 못한다면 그것이 정말 무지한 것 아닐까?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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