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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길’에서 한·중관계 미래를 묻다 ① 옌안 황토고원서 7년

중앙일보 2012.01.11 03:00 종합 8면 지면보기
1968년 12월.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문화대혁명 와중에 통제불능에 빠진 홍위병(紅衛兵) 운동에 제동을 걸어야겠다고 판단했다. 혈기왕성한 지식 청년들을 농촌으로 내려 보내 재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다.


토굴로 쫓겨간 16세 베이징 소년

 이듬해 1월 9일 베이징역. 중학교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한 16세의 시진핑(習近平·59)은 열차에 몸을 실었다. 행선지는 산시(陝西)성 북부 산베이(陝北). 누렇다 못해 붉은 빛이 감도는 서북쪽 황토고원(黃土高原) 가운데 위치한 옌안(延安)이었다. 마오가 2만5000리 대장정을 마친 뒤 10여 년간 공산혁명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마오가 생전에 두 번 다시 찾지 않았을 정도로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다. 베이징 시민들에겐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시진핑 국가부주석은 올해 말 중국공산당 총서기, 내년 3월에는 국가주석직을 예약한 상태다. 앞으로 10년간 중국을 통치할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1953년생 뱀띠(중국에선 작은 용으로 불림)인 시진핑은 흑룡의 해를 맞아 가장 높은 곳으로 비상할 채비를 마쳤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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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이 차를 갈아타고 사흘 만에 도착한 곳은 산시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촌. 시진핑의 신분은 학생에서 원안이(文安驛) 인민공사 기초건설대 소속 사원(社員)으로 바뀌었다. 황토고원의 토산에 수평으로 뚫은 토굴인 야오둥(窯洞)이 숙소로 배정됐다.



 곧바로 중노동이 시작됐다. 농민들과 함께 똥장군을 메고 산을 올랐고, 괭이로 하루 종일 언 땅을 팠다. 작두로 여물을 썰고 바느질도 직접 했다. 밤마다 벼룩에 물려 피가 나도록 긁어야 했다. 시진핑은 힘겨운 노동을 견디지 못해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야반도주했다. 농민들과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라”는 이모 치윈(齊雲)의 설득으로 다시 량자허촌에 복귀했다.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다. 사춘기의 반항이 줄면서 성숙한 젊은이의 면모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장세정 특파원
 



지난해 11월 28일. 그 옌촨현 량자허촌을 찾았다. 옌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70㎞를 차로 달려 현장에 도착했다. 60여 가구 200여 명이 사는 산촌이었다. 사방이 황토고원의 거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60∼80대 촌로들은 시진핑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시진핑을 현지 방언으로 “시진핑 와와(젊은이)”라고 불렀다. 농민 량모(梁·82)는 “한겨울에 맨발로 도랑에 들어가 솔선수범하면서 일하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시진핑이 1969년부터 약 7년간 머물렀던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의 야오둥(토굴) 내부 모습. 2009년 성 정부가 3만 위안을 투자해 현대식으로 새단장했다.
 촌민위원회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시진핑의 발자취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토굴이 남아 있었다. 바로 옆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20대 청년은 “시진핑이 7년간 살았던 토굴”이라고 확인해 줬다. 그러나 지금은 말이 토굴이지 외벽이 채색 벽돌로 단장된 현대식 야오둥이었다. 단칸짜리 토굴이 아니라 세 칸이었다. 약 20평 크기의 앞마당까지 갖추고 있었다. 토굴 내부에는 침대와 이부자리가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난방과 취사용 부뚜막이 설치돼 있었고, 다른 칸에는 농기구도 보존돼 있었다. 시진핑은 이곳에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호롱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2009년 산시성 지방 정부가 3만 위안(약 540만원)을 들여 토굴을 깔끔하게 단장했다. 시진핑의 최고지도자 등극을 앞두고 그의 유적을 복원했다고 한다. 일종의 성역화 작업이다. 시진핑도 이 마을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시진핑은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시 당서기이던 92년 이곳 어린이들에게 자명종 시계를 선물로 보냈다. 93년에는 변압기를 설치해 전기를 넣어줬다. 99년에는 마을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주민들은 “시진핑이 푸저우시 서기 시절 이곳을 다시 찾아왔었다”고 기억했다.



 



지금도 량자허촌 주변은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주민들은 “옌안과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량자허촌 근처에 톨게이트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옌안 시내에서 210번 국도를 따라 가다 량자허촌으로 진입하는 시골길은 시멘트로 깔끔하게 포장돼 있었다. 한 농민은 “몇 년 전에 길이 3m로 포장됐는데 곧 6m로 확장된다”고 전했다.



주민들의 생활도 시진핑이 생활하던 60년대말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농부 류스자오(劉世兆·67)의 야오둥에 들어가봤다. 위성으로 TV를 시청할 수 있었고, 세탁기도 갖고 있었다. 4년 전에 상수도가 개통됐는데 시진핑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웃에 살던 시진핑이 조만간 최고지도자가 된다는 소식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이 된 뒤 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시진핑은 75년 가을 칭화(淸華)대에 진학할 때까지 이곳에서 약 7년을 보냈다. 공산당 입당원서를 냈으나 열 번이나 퇴짜를 맞다가 74년 입당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량자허촌 대대(大隊) 지부 서기로 임명됐다. 서기 시절 그는 량자허촌에 메탄가스를 보급하기 위해 공사를 하다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고 한다. 시진핑은 2000년 잡지 ‘중화자녀(兒女)’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량자허촌에서의 체험 때문”이라며 “군중과 함께 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배웠고 자신감을 키웠다”고 말했다.



 올가을 열리는 중국 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후진타오(胡錦濤)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가 된다. 내년 3월에는 국가주석에 취임하게 된다.



문혁 시절 황토고원의 토굴에서 사춘기를 보낸 소룡(小龍·뱀띠) 시진핑이 흑룡(黑龍)으로의 비상(飛翔)을 앞두고 있다.



◆홍위병=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1966∼76년) 기간에 마오를 추종한 청년 조직을 일컫는다. 주로 중·고·대학생들로 구성됐으며 노동자·농민·군인도 참가했다. 홍위병은 붉은 완장을 차고 ‘마오쩌둥 어록’을 외쳤다. 정부·군·학교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기득권 세력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폭력과 비판 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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