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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꿈속의 남북 대화

중앙일보 2012.01.11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연초부터 걸프만(灣)이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뭔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남조선에도 불똥이 튈 텐데 걱정이겠구만.” 평양에서 온 기자는 석유 금수(禁輸) 조치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으로 맞서고 있는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새해를 맞아 남한 기자와 북한 기자가 판문점에서 만났다. 둘은 흉금을 터놓고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미국의 압력이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야. 이란산 원유 수입량이 줄어드는 거야 다른 데서 벌충하면 그만이지만 이란에 목을 매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2000개가 넘으니 그게 문제지. 이란의 보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거든. 유가도 걱정이고. 그건 그렇고 어째서 이란은 북한을 그렇게 졸졸 쫓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북한의 당면 문제는 경제



[일러스트=강일구]


 “그거야 테헤란에 물어볼 일이고, 문제는 이스라엘 아니겠나. 워싱턴 정치권이 유대계 로비스트들에게 발목이 잡혀 있다는 거야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이란 핵시설 폭격하겠다고 이스라엘이 막무가내로 나오면 미국인들 어쩌겠나. 그걸 막으려면 무 토막이라도 자르는 시늉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이 국내적으로 코너에 몰려 있는 데다 이란이나 미국도 올해 선거가 있으니…. 장난하다 불 내는 것 아닌가 몰라.”



 김정은 체제의 과제로 화제가 넘어가자 평양 기자의 태도가 의외로 솔직해졌다. “미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도 말하지 않았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지금 공화국이 당면한 첫째 문제는 경제야. 강성대국의 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 인민이 배를 곯고 있는 건 여전하니 심각한 문제지. 영양지원이든 식량원조든 미국에서 일단 최대한 끌어오는 게 급선무야. 대선을 앞둔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한반도가 시끄러워지는 것은 바라지 않을 거라고 봐. 더구나 오바마는 ‘두 개의 전쟁’을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나. 장거리 미사일 좀 이동시키고, 영변에서 연기 좀 피워 올리면 뭔가 좀 오지 않겠나.”



 “그걸 가리켜 ‘희망적 사고’라고 하지. 그런다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선군체제를 고수하는 한 북한 경제가 나아질 순 없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보네.” 평양에서 온 기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장 동지 혼자만의 뜻으로 되기 어렵다는 게 문제지. 이해가 걸린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합의 도출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될 걸로 보네. 충격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조금씩 살살 문을 여는 거지. 6자회담 카드도 적극 활용하고….”



 서울에서 온 기자가 화제를 돌렸다. “자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신년 시리즈 기사 읽고 있나. ‘위기의 자본주의’ 말이야. 눈에 띄던데.”



 “읽고 있다네. 그런데 너무 싱겁더군. 결국 대안이 없다는 말 아닌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 대해 윈스턴 처칠이 말했던 것처럼 ‘더 나은 대안이 없는 최악의 시스템’이란 말 아닌가.”



 “유감이지만 그렇다네. 제한 없는 부(富)의 추구는 결국 거품을 일으켜 언젠가는 터지게 돼 있다는 게 자본주의의 첫 번째 결함이고,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과 이긴 사람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불평등 구조가 자본주의의 두 번째 결함이지.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나라도 그걸 제대로 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터진 게 글로벌 금융위기이고, ‘점령하라(Occupy)’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이유지.”



남북경색 타개 노력 필요



 서울 기자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경제와 정치는 동전의 양면이야.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종점이 되기 위해선 자본주의의 결함을 지속적으로 치유하는 자정(自淨) 능력이 전제돼야 하는데 정치가 지나친 당파성 때문에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들이 당면한 공통 문제야.” 북한 기자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돈의 문제야. 미국 선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나. 천문학적 아닌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치인들은 기업인들에게 미리 면죄부를 써주고, 그 대가로 받은 정치자금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 아닌가. 남조선도 보라고. 지금 돈봉투 때문에 난리 아닌가. 그 돈이 다 어디서 왔겠나.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면 결국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았겠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고…. 정치가 경제를 바꿀 수 없으니 자본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란 말이 나오는 거지.”



 서울 기자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돈 안 드는 선거에서 한국발 선거 혁명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는 말로 눙치고 나서 평양 기자에게 정색을 하고 따졌다. “그런데 북한 기자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북한은 왕조 국가이고, 신정(神政) 국가 아닌가. 민주주의의 문제를 말할 자격이 없네.” 북한 기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공화국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언젠가는 바뀔 것으로 믿네. 결국은….”



 대화 끝에 두 사람은 한반도 문제는 결국 미국과 중국의 문제라는 데 동의했다. 미국이 새 국방전략의 우선순위를 아시아·태평양으로 이동한 것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며, 중국은 그런 미국에 맞서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색된 남북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남과 북의 자주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의기투합했다. 깨어 보니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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