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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하 딸, 유치원서 '심은하가 이렇고…' 듣자

중앙일보 2012.01.08 09:19
여성중앙 최근 펴낸 『굿 소사이어티』에서 지상욱(전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배려하고 양보하는 건강한 시민 의식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슬하의 두 딸에게도 비우고 나누는 마음을 강조한다는데. 그가 생각하는 좋은 집, 좋은 사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지상욱의 고민을 담은 책 『굿 소사이어티』출간을 기념한 북 파티가 2011년 11월 22일 열렸다.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진행된 이날 행사를 위해 그는 기획부터 대관, 게스트 섭외, 식순과 동선까지 모든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청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그는 2010년 지방 선거 이후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의 원인에 대해 각계각층 사람들과 고민하고 대화한 내용을 묶은 새 책에 대해 소개했고, 5인의 패널을 초대해 토크쇼 형식으로 소통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임백천, 지상렬, 김현철, 장혜진 등 지인들이 특별히 참석해 북 파티를 빛냈다. 이 중 임백천은 “지상욱 박사와는 목욕탕을 같이 다니는,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본 사이다. 평소 편하게 술 마시고 밥 먹고 할 때는 몰랐는데 어느새 이렇게 근사한 책을 썼다니 훌륭하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회 현상을 바라보고 분석한 이야기니 함께 고민해 볼 만하다”는 말로 그를 격려했다.



한편 그의 아내 심은하도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이날 행사장을 찾아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으로 행사를 지켜본 그녀는 행사 말미에 북 파티를 찾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남편이 여러 해 동안 고민하고 공부한 것들이 좋은 결실을 맺게 돼 기쁘고 많은 분들이 이렇게 축하해 주시니 감사해요. 남편은 단순히 책을 쓰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색다른 방법으로 소통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준비하는 동안 옆에서 보기에 힘겹고 괴로운 시간도 많았는데 지금 이렇게 결과를 얻고 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에요. 게다가 남편이 입고 있는 청바지를 보니까 오늘따라 마음이 더 찡하네요. 남편이 저 청바지를 늘 입고 다녀요. 무릎도 해지고 낡아서 오늘만큼은 제발 입고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부득불 입고 나왔네요. 시부모님도 와계시는데 한 말씀 들을지도 모르겠어요(웃음).”



끝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애 많이 썼고, 고마워요”라는 말로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아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격려 속에서 그의 첫 번째 북 파티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가족에게 헌신적인 아내 심은하는
‘내가 지켜줘야 할 여자’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더불어 모처럼 아내 심은하의 근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여전히 ‘심은하의 남편’으로서만 부각되는 게 불편한 듯했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어렵게 그를 설득해 정확히 반반의 분량을 서로 확보했다. 인간 지상욱에 대한 이야기 반, 아내 심은하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 반. 그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오늘은 청바지 차림이 아니네요 조찬 모임이 있었어요. 사실 저는 국회에 나갈 때도 위에는 셔츠에 넥타이 매고 아래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는데 오늘은 전직 대통령, 외국의 현직 대통령 등 어려운 분들이 많이 참석하는 자리여서 예의를 좀 차렸죠. 젊어서 그런지 저는 청바지가 편해요. 말하자면 청바지는 저에게 작업복이고 일상복이고 전투복이에요. 선거 치를 때도 청바지를 입었으니까요. 가장 대중적인 옷이잖아요. 누구나 청바지 한 벌 정도는 다 가지고 있지 않나요. 저는 한 4벌 정도 가지고 돌려 입어요.



북 파티에 모처럼 아내가 동행했어요. 자주 안 보여주는 이유가 있나요 안 그래도 얼마 전 한 토크쇼에서 제게 출연 제의를 해왔어요. 그런데 조건을 걸더라고요. 처음에는 “부인은 같이 못 나오시죠” 하고 조심스럽게 묻기에 “안 됩니다” 했더니 “그러면 VCR을 통해 인사말만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역시 “안 됩니다” 그랬어요. 아마 그 프로그램에서 북 파티를 취재하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아내의 인사말을 담았다면 그건 가능했을지 몰라요. 북 파티 때처럼 제가 하는 행사에 아내가 동행해 손님들에게 인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노출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획되고 연출된 노출은 하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저희의 원칙이 깨지는 거예요. 그 원칙은 아내가 원하는 바이자 제가 지켜줘야 하는 것이죠. 아내는 제가 지켜야 할 여자이지 포장을 뜯어서 세상에 내놓을 여자가 아니에요. 그게 남편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작년 선거 때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단 한 번도 노출시킨 적이 없잖아요. 그때 욕 많이 먹었어요. 주변에서도 당에서도 말이 많았지만 어른들하고 척을 지면서까지 지켰던 원칙이에요. 그래서 집사람이 제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 거예요. “여보 나 나가도 괜찮아. 살아도 같이 죽고 죽어도 같이 죽자” 이러면서.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를 바라는 마음은 없나요 아내는 작년 선거 때도 정치인의 아내로서 자기가 할 도리를 다 했어요. 늘 유세장에 함께 와서 승합차 안에서 제가 유세하는 걸 지켜봤고 운동원들이 먹을 도시락을 50개씩 싸와서 직접 나눠주고 격려하고…. 단지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을 뿐이에요. 물론 아내가 나타나면 언론이 몰리겠죠. 하지만 언론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왜 아내에게 시킵니까. 그건 제가 할 일인데요. 설사 그렇게 한들 ‘마누라 이용해서 정치한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습니까. 제 아내는 그런 가치의 사람이 아니에요. 안 보이는 데서 남편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차고 넘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머지는 제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아내도 정치에 관심이 많나요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남편이 하는 일이니까 이왕이면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고 싶겠죠. 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까 사회가 너무 엉망이라는 걸 느끼고 비로소 정치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사실 정치라는 게 생활 속에 있는 거거든요. 아이 문제, 부부 문제… 결국은 누군가를 편안하게 해주고 배려하는 게 정치잖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가 지금은 삶 자체가 정치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아요.



지상욱은 북 파티에서 시민 패널들과 토크쇼 형식의 미니 토론회를 갖고 자신의 정치 철학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냈다.



아내가 바라는 정치는 어떤 건가요 아이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해요. 워낙에 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요. 이처럼 아내를 비롯한 국민들이 바라는 건 결코 거대한 것이 아니라 아주 섬세하고 작은 것들이에요. 굿 소사이어티가 해야 하는 배려인 것이고. 이웃과 함께하는 삶, 그게 바로 굿 소사이어티가 지향하는 바예요.



집안부터 굿 소사이어티가 돼야 할 텐데,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나요 무엇보다 정직해야죠. 이제는 아이들이 좀 커서 꾀가 생기니까 거짓말을 할 때가 있어요. 분명 둘 중에 하나는 잘못한 일인데 둘 다 안 했다고 잡아떼는 거죠. 그러면 엄마든 아빠든 둘 중 한 명이 나서 아이들을 앉혀놓고 끝장을 봐요. 아무리 울어도 봐주는 법은 없어요. 결국 한 명이 자복을 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듣고 끝을 내죠. 그리고 존댓말을 쓰게 해요. 평소에 존댓말을 쓰다가도 아이들이다 보니 골이 나면 반항을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도 저희 부부는 끝장을 봐요(웃음). 지금은 아예 저희도 아이들한테 존댓말을 쓰고 있어요.



남다른 훈육 방법이 있나요 집에 까만 방이 있어요.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깜깜하죠. 거기서 스스로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일대일로 같이 있어요. 그리고 생각의 의자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스스로 잘못했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 앉아 있게 해요. 잘못을 깨닫기 전에는 못 일어나는 의자예요. 까만 방은 제 아이디어고 생각의 의자는 아내의 아이디어예요.



아내가 현모양처라는 소문이 자자해요 굉장히 헌신적이에요.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서부터는 거의 매일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갔다 오곤 했어요. 물론 참관 수업 등이 있을 때는 더욱 당연하고요. 그러다 보니 불편한 문제가 생길 때도 있어요. 큰딸 친구들이 그 아이 앞에서 ‘심은하가 이렇고 저렇고’ 아내 이름을 불러가면서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에요. 엄마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아이들이 따라 한 거겠죠. 그 때문에 딸아이가 상처를 좀 받았지만 속상해도 어쩌겠어요. 유치원에서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나서지 않아요. 요즘 엄마들은 아이한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헬리콥터 타고 움직이는 특공대처럼 순식간에 나타나서 해결해 준다면서요. 그게 뭡니까. 애들 잡는 교육이죠. 아내는 이런 ‘헬리콥터 맘’과는 거리가 멀어요. 선생님을 믿고 맡기는 편이죠. 그래서 지금은 아이와 함께 유치원을 다녀오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있어요.



딸을 고급 유치원에 보낼 생각은 안해봤나요 어린이집 한 군데를 쭉 다니게 하고 있어요. 제 모교에서 ‘생활지도원’인가 하는 이름으로 운영하는 곳인데, 아이들을 ‘방목’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어요. 학교 부지가 넓어서 그 안에 산도 있고 놀이터도 있고. 제가 어릴 때 흙바닥에서 구르면서 자랐기 때문에 아이들도 그렇게 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는 무한정 뛰어놀면서 친구들과의 유대 관계, 협동, 양보, 배려 이런 것들을 익히는 것이 더 소중하니까요.



사교육은 얼마나 시키나요 저희 아이들은 유치원 갔다가 집에 오면 거의 놀아요. 자기들끼리 장난감 가지고 놀거나 엄마, 아빠한테 책 읽어 달라고 하는 게 일과죠. 아니면 같이 자고 싶다고 하고. 저희 부부가 같이 자고 있으면 한 놈이 와서 그 사이에 끼어요. 그러면 한 놈이 남잖아요. 그래서 어떨 때는 제가 큰아이를 데리고 자고 아내가 둘째를 데리고 자는 식으로 따로 잘 때도 있어요. 자려고 누우면 항상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데 아는 이야기는 이미 다 해줘서 이젠 아예 이야기를 만들잖아요. 이야기 만들어내는 일이 쉽지가 않아요(웃음).



요즘은 예술 교육이 추세라고 하던데요 집에서 그림 그리고 노는 정도예요. 덕분에 아내의 작품이 대부분 아이들 스케치북에서 나오죠. 엄마는 그림책하고 거의 똑같이 그림을 그려주니까 아이들이 아주 좋아해요. 그런데 아빠가 그리면 전혀 엉뚱한 그림이 나오니까 아이들이 안 좋아하죠.



아내는 제가 지켜야 할 여자이지 포장을 뜯어서 세상에 내놓을 여자가 아니에요. 그게 남편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작년 선거 때 당에서도 말이 많았지만 어른들하고 척을 지면서까지 지켰던 원칙이에요



악기 교육은 안 시키나요 악기에 대해서는 아직 아이들이 관심을 안 가져요. 한번은 음악을 하는 고모가 큰아이 생일날 선물로 장난감처럼 생긴 바이올린을 하나 사줬어요. 그날 바로 부숴버렸어요(웃음). 아직 바이올린을 시키는 건 무리인 거 같더라고요.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해야지 무리하게 시키면 시작도 하기 전에 질려버리지 않겠어요. 몸에 좋은 음식도 억지로 먹이면 영영 안 먹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기다리자고 늘 이야기해요. 제가 ‘아휴, 우리 애들은 왜 저럴까’ 그러면 아내가 ‘여보, 기다리자고 했잖아. 기다리자’고 하고, 반대로 아내가 조급해하는 것 같으면 제가 잡아주는 식이죠.



다른 집 얘기 들으면 조바심 날 때 있잖아요 ‘남들은 이렇게 한다’ ‘다른 집에서 이렇게 해보니 좋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지만 저희 부부는 “아이가 좋아하면 그렇게 하자, 대신 아이가 싫어하면 하지 말자” 그래요. 영어 조금 일찍 하고 수학 조금 일찍 하면 뭐하겠습니까. 저희들 자랄 때처럼 ‘국산사자음미’를 다 잘하는 모범생이 각광받는 시대는 지났어요. 어쩌면 그런 모범생이 제일 경쟁력 없는 사람일 수도 있죠. 다 못해도 어느 한 가지를 특출하게 잘하면 그 사람이 더 특별한 사람일 수 있는 거죠. 그런 이유에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일단 어릴 때 인성을 잘 길러놓고. 그다음에 특기를 계발해야겠죠.



교육 정보는 어떻게 구하나요 아내와 함께 강의를 자주 들어요. 종종 전문가들이 교회에 와서 강연을 하기도 하니까요. “자기 자식이지만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거쳐 가는 별개의 생명, 인격이라고 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물론 공감하지만 실천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아요. 저희 부부도 아직 부족한 엄마, 아빠니까 때론 눈물도 흘리고 방황하죠. 아이들이 뭘 잘못하면 혹시 우리가 부모로서 부족한 탓은 아닐까 하는 자책도 하고. 그런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교회에서는 그래요.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잠깐 맡아서 기르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그러니 소유하려 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고. 사회로 따지면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 내외가 바빠서 잠깐 그 자녀들을 맡아 기르는 기분’으로 아이들을 키우면 딱이라는 거죠. 아이들에 대한 존중, 바로 그게 정답이에요.



아내의 살림 솜씨는 어떤가요 살림 잘해요. 처음보다 많이 늘었죠. 요즘은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오고 나머지 날은 아내 혼자 아이들 돌보면서 집안일도 도맡아 하고 있는데 학습과 노력으로 스스로 노하우를 터득해 가는 것 같아요. 저도 많이 도와줘요. 제가 먹은 밥그릇은 제가 씻으려고 하는 편이니까요. 아내가 들으면 한 번 하고는 생색낸다고 할지 모르지만(웃음).



대중에게는 여전히 스타인 아내인데 당신에겐 일상인가요 감사한 일이죠. 그래서 더 귀한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아내의 컴백을 원하지만, 글쎄요. 사실 어떤 분야에서든 정점일 때 박수 받으면서 내려오기가 참 힘든 일이거든요. 하지만 아내는 정점에서 박수를 받으면서 내려왔고 그야말로 자기 분야에서 최고를 맛봤잖아. 그렇기 때문에 다시 롤백을 한다는 게 커다란 의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아요. 더 이룰 게 남아 있지 않으니까. 대신 새로운 일, 새로운 역할을 고민해 볼 수는 있겠죠. 아내의 뜻을 존중할 생각이에요.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남자,
그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란



그의 명함은 꽤 단출했다. 직책이나 직함은 없이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게 전부였다. 대신 자신의 사진이 박혀 있으니 미심쩍은 사람으로 오해는 하지 말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얼마 전 자유선진당 탈당을 선언하고 홀로서기를 한 그는 단출한 명함만큼이나 꽤 홀가분해 보였다.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듯 최근 펴낸 『굿 소사이어티』에서 그는 건강한 시민 사회 건설을 위한 몇 가지 화두를 제시했다. 비움과 양보, 나눔과 배려.



『굿 소사이어티』란 책을 냈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2010년 지방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 정치가 국민에게 꿈을 주진 못할망정 꿈을 짓밟고, 밥을 주진 못할망정 깡통을 앗아가는 모습들을 현장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덕분에 반성하고 깨닫게 된 것들이 많았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세상에 이야기하고 싶은데 반영이 잘 안 돼요. 인터뷰를 해도 그런 건 다 가려놓고 가벼운 이야기들만 실리고,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려고 해도 정치인이라고 잘 안 받아줘요. 속상하고 속 터지니까 제가 직접 쓰기로 한 거죠.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같이 고민하고 소통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가 느낀 사회의 문제점을 세상에 대고 외치는 거예요.



내용이 좀 어렵던데요 공학도 출신이다 보니 글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글재주도 없으면서 책 썼다고 할까 봐(웃음). 사실 제가 던지는 화두, 키워드들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1, 2장의 경우 영국의 빅 소사이어티와 시민보수주의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려다 보니 인문 사회학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수밖에 없었고요. 대신 3장의 경우는 제가 느낀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열거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쉬워요. 제 책이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은 아마 1, 2장까지만 읽다 포기한 게 아닐까요(웃음).



당신이 생각하는 굿 소사이어티란 뭔가요 한국말로 하면 좋은 사회예요. 이념, 지역, 세대와 상관없이 서로 소통하고 비우고 나누고 봉사할 수 있으면 그게 좋은 사회잖아요. 단, 시민이 주체가 돼서 그런 좋은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마틴 루터 킹은 “이 시대 최고의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라고 했어요. 부당한 일에 불평불만하고 하나 가진 사람이 두 개 가진 사람을 시기하고 욕할 게 아니라 어렵지만 서로 베풀고 끌어안으면서 사회를 발전시키려는 시민 의식이 있는 사회, 그게 제가 생각하는 굿 소사이어티예요.



정치인으로서 포지션이 좀 애매해요. 신구 중 어느 쪽인가요 저는 세 차례 대변인을 했고, 한 번은 완주해서 서울시장 선거에 나갔고, 한 번은 출마하려다 구태 정치에 발목이 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구태 정치가 싫어서 이제는 항거하고 나온 거죠. 기존의 정치는 지금 불고 있는 국민적인 바람, 예를 들면 안철수 바람 같은, 이 바람을 목욕탕 물장구의 파장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싫어요.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좀 더 고민해 보겠지만, 새로운 정치 환경을 형성하는 데 한 역할을 하려고 해요.



가진 게 많은데 왜 굳이 어려운 정치를 하려고 하는 건가요 가까운 친구들도 그래요. “너는 정치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 정치를 해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그러면서 “정치가 체질에 맞긴 하느냐”고 물어요. 사실 정말 안 맞아요. 그런데 전 그래서 해요. 정치가 체질인 사람들이 하는 정치가 국민들에게 외면받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적 관습·문화와 안 맞는 제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디 내가 한번 해보자 싶어 나선 거죠.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아도 될 텐데요 회사 일은 부사장직을 맡아 계속 돕고 있어요. 물론 정치 활동하느라 매일 출근하지는 못하지만 해외 업무나 기획 업무 등에 관여를 하죠. 하지만 그것만 전적으로 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서요. 사업하면서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하기에는 그간 제가 받아온 사회로부터의 혜택과 그로 인한 사회적 책무가 매우 커요. 대학에서, 회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면서 어려웠던 적이 있었나요 제 아버지는 원래 군인이셨어요. 그러던 중에 1년 반 정도 옥고를 치르신 적이 있어요. 그때 가세가 많이 기울었죠. 어머니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집을 나가셨고, 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당시 서울 청량리에 맘모스백화점이라는 상가가 있었는데 가끔 어머니가 그곳 지하에 가서 제게 우동을 먹여주셨어요. 테이블들이 보기 좋게 놓여있는 식당이 아니라 기다란 카운터에 높은 의자 서너 개가 겨우 놓여 있는 가게였죠.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맛있게 우동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였어요. 아버지가 안 계시는 동안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우동집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때 아버지의 부재, 그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 친구들 사이에서 위축되는 마음, 그런 것들을 경험했죠.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요 옥고를 치르고 돌아오셔서 조그만 규모로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지금의 한성실업이죠. 그때 시작한 사업을 지금껏 36년간 해오고 계신 거예요. 그간 단 한 번도 종업원 봉급을 하루도 늦춰서 지급한 적이 없으세요. 저희 아버지는 회사에서 일하는 간부들을 회초리로 때리시는 분이에요. 어느 회사에서 회장이 전무, 상무를 회초리로 때리는 일이 가능하겠어요. 아버지와 자식 같은 신의 관계가 아니면 불가능하죠.



장혜진의 ‘내게로’가 애창곡이라고 하던데 어떤 사연이 있는 곡인가요 친구들은 다 아는데, 제가 울면서 웃으면서 참 많이 불렀던 노래예요.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제 인생이 다 들어 있어요.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1980년대만 해도 공동 프로젝트가 있으면 서양 애들이 동양 애들을 안 끼워줬어요. 그러다 보니 넷이 하는 프로젝트를 혼자 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10년 동안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꽤 힘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한국에 들어왔는데 하필 IMF 시절이었어요. 스탠포드대에서 석사 하고 도쿄대에서 박사 하고 UC버클리에서 박사 후 과정까지 마치고 왔으면 딴에는 금의환향이잖아요. 그런데 취직이 안 되는 거예요. 1998년 여름에 돌아와서 1년을 놀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한심해요. 그러다 기회가 닿아 모교에서 건설경영학 강의를 했어요. 소위 말하는 시간 강사죠. 시간당 2만원을 받고 일주일에 3시간씩 강의를 했더니 한 달 24만원이 제 월급이더라고요. 그렇게 3년간 강의를 하다가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들어갔죠. 거기도 처음엔 월급 160만원 받고 비정규 계약직으로 들어갔어요. ‘내 몸값이 이 정도구나’ 싶더라고요. 말을 하다 보니 저의 과거사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는데 그렇게 힘들 때마다 부르던 곡이에요.



정치에는 어떻게 입문하게 됐나요 이회창 자유선진당 전 대표께서 2002년 대선에 실패하고 눈물의 기자회견을 하고 떠나셨잖아요. 저는 그때 그분을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곁을 떠나는 걸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죠. 좋을 때는 붙어서 잘 지내다가 조금 어려워지니까 떠나가고, 그런 건 제 성격에 안 맞아요. 그런데 마침 가까운 지인이 이회창 전 대표가 스탠포드에 가시는데 도와주면 좋겠다고 해서 연구원직을 사직했죠.



앞으로의 행보는 어떻게 될까요 기회가 되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사회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많이 갖고 싶어요. 5명이 됐든 10명이 됐든 저를 보고 싶다고 하면 어디든 갈 생각이 있습니다. 작년 선거 때 제가 시장이 되면 휴대폰 번호를 공개한다고 했었어요. 그만큼 허심탄회하게 사회에 대해 고민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금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사람과 왕래하면서 때로는 오프라인에서 만나기기도 해요. 처음에는 신기해하던 사람들이 만나고 나서는 인간 지상욱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좋다고 해주니 저는 감사할 따름이죠. 제가 국회의원도 아니고 장?차관도 아닌데 그럼에도 저를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감사하고, 또 10년 전 은퇴한 전직 배우인 제 아내를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준다는 게 감사해요. 보답할 방법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취재_조영재 기자 사진_이민희(studio lamp), 지상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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