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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기획-다시 일자리 (상) 중소기업 업그레이드가 해법이다] ‘88 딜레마’를 깨라

중앙선데이 2012.01.08 01:04 252호 6면 지면보기
굴뚝 산업공단에서 첨단 테크노파크로 탈바꿈한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의 전철역. 서울 지하철 1호선과 7호선의 환승역인 이곳은 아침저녁 젊은 출퇴근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최정동 기자
최상의 복지는 일자리다. 사회통합과 지속성장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0순위 국정과제다. 20년 만에 총선·대선을 동시에 맞은 선거의 해 임진년(壬辰年)에 고용 창출의 혜안을 갖춘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자는 여론이 거세다. 박영범 한성대(경제학·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 교수는 “선거철마다 거듭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방안을 담은 공약을 누가 내는지 눈을 부릅뜨고 가려내자”고 말했다. 유권자 나름의 안목을 갖기 위해 각계 전문가 30여 명에게 일자리 문제의 해법을 물어 다음 두 가지로 집약했다. 우리 일자리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을 ‘괜찮은’ 일자리로 만들자는 것이 그 하나, 제조업에 더해 서비스·지식 산업의 양날개로 나는 한국경제를 이루자는 것이 또 하나다. 두 가지 제언을 2회에 걸쳐 다룬다.

88만원 세대, 일자리 88% 차지하는 중소기업 기피

서울 소재 한국산업기술대학에서 만난 이영제(26·가명)씨는 얼마 전 학교에 ‘졸업 유예 신청서’를 냈다. 대기업 취직 준비를 위해 졸업 학점 중 6학점을 일부러 남겨둔 것이다. “솔직히 급여가 적고 근무여건도 나쁜 중소기업에 가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도 장가 잘 가려면 고시촌에 들어가 공기업이나 대기업 준비를 하라고 하세요.”

15~29세의 이른바 청년실업자 수는 40여만 명, 취업 준비생·구직 단념자 등을 포함한 ‘사실상 실업자’는 1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상당수 청년에게 중소기업은 ‘논외’다. 지난해 말 국내 최대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의 대졸 공개 채용에 3000여 명이 몰려 임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통역 등 2명을 뺀 일반직 채용이 3명이었으니까 입사 경쟁률이 무려 1000대 1인 셈이다. 경제단체는 정부 부처·공기업처럼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이라 근래 대학가엔 ‘대한상의 취업 동아리’가 생길 정도라고 한다. 박종남 대한상의 상무는 “우수 인력이 많이 오는 건 반갑지만 상의의 회원 중소업체에도 이런 인재들이 골고루 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 녹산공업단지에서 6개월 전 철강가공업을 시작한 신상조(47·가명)씨는 사무실 창밖을 보며 “요즘 젊은이들이란…” 하며 한숨지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 그는 당초 걱정했던 일감 부족보다 예상 못한 구인난으로 고전하고 있다. 10년 경력 기술직은 연봉 4000만∼5000만원, 신입 사무직은 연봉 2000만원 안팎을 내걸었지만 찾아오는 이가 없다.

이런 현상은 서울·수도권보다 지방에서 더욱 심하다. 고용노동부의 지역별 구인·구직 통계를 보면, 서울은 2010년 한 해 구인 27만 명, 구직 55만 명으로 구직 대비 구인 비율이 50%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충남은 그 비율이 116%로 일자리가 남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남·경기·충북도 80%를 웃돈다. 강원도 고성의 경동대 이윤희 취업복지처장은 “졸업생들은 중소기업을 택하느냐 마느냐보다 서울·수도권 직장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더 따진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은 두 얼굴을 지녔다. 겉만 보면 중소기업은 우리나라 전체 기업 수의 99%, 고용 인력의 88%를 차지하는 일자리의 곳간이다. 하지만 ‘백수로 살더라도 작은 기업에는 안 간다’는 인식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197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3D(Dirty·Dangerous·Difficult) 업종이란 이미지가 워낙 뿌리 깊은 탓이다. 실제로 대기업보다 못한 보수·복지, 일반의 시각 등도 중소기업 취업 기피를 부추긴다. 구직난 속의 중소업계 구인난이 얼마나 심한지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중소제조업 인력채용 현황’ 조사를 보면 중소기업 세 곳 중 두 곳(68.3%)이 상반기 채용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경기가 매우 불투명한데도 채용계획이 많은 것은 대부분 ‘자연 감소’(68.8%)와 ‘인원의 절대 부족’(26.8%)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남길순 서울시 일자리지원과장은 “중소기업 경영자 스스로 좀 더 경쟁력 있는 회사, 좀 더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한편으론 구직자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중소기업이 바뀐 사례부터 살펴보자. 전형적 굴뚝산업단지였던 서울 구로공단이 가산·구로디지털단지로 변신하면서 청년 취업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곳이 됐다. 허허벌판이던 경기도 판교 지역이 정보기술(IT) 디지털밸리가 되면서 젊은이들의 인기 있는 일터로 탈바꿈했다. 취업정보 포털인 잡코리아의 김화수 대표는 “중소기업 취업을 꺼리는 청년들을 철없다고 힐책하기 전에 젊은이들이 즐겁게 꿈을 펼칠 수 있는 직장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산업에 IT를 가미한 디지털 중소기업 모델도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이노비즈협회)가 지난해 3만5000여 회원사를 상대로 조사한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DB) 분석’ 결과를 보면 지난해 1∼10월 3만여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이노비즈(Innobiz)란 전통 중소기업과 대비해 신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생 업체를 뜻한다. 중소기업청이 이노비즈 기업 2000곳을 조사한 ‘2011년 정밀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기업당 종업원이 41.1명(정규직 비율 95.5%)으로 일반 중소기업(18.6명)의 두 배 이상이었다.

지방 중소기업이 우수 인재를 영입해 강소기업으로 거듭나는 성공 사례도 많이 나와야 한다. 경남 함안군의 풍력발전기용 부품 수출회사 미래테크는 고졸 취업자에게 파격적 혜택을 줘 청년 기술인재가 몰리는 회사가 됐다. 고졸 입사자 초임이 연 2400만원으로 대기업에 크게 뒤지지 않고 호봉도 대졸자와 같게 했다. 대전시 대덕의 에이펙은 컴퓨터·가전제품의 열을 식혀 주는 ‘히트 파이프(heat pipe)’를 생산한다. 이력서에 출신 학교를 기재하는 난이 없고, 의욕과 열정을 주로 평가하는 면접을 본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개성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몰렸다.

중소기업 일자리 정보 인프라도 개선돼야 한다. 대기업 취업 정보는 상세하고 객관적이며 손쉽게 접근 가능한데, 중소기업 정보는 그렇지 못하다. 인터넷 취업 사이트를 들어가도, 취업박람회 상담창구에 가도 특정 중소기업이 유망한지, 근무 환경은 괜찮은지, 보수는 어떤지 등 궁금한 정보를 알아내기 힘들다. 중소기업청의 권대수 정책총괄과장은 “앞으로 6만9000개의 ‘우량 중소기업(good company)’을 널리 알려 취업 정보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을 좋은 직장으로 만드는 데는 노련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경험도 큰 도움이 된다.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만난 최세영(50·가명)씨. 25년 가까이 대기업에서 재무통으로 인정받으며 일한 그는 지난해 초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1년가량 쉬다가 이 센터를 통해 서울의 한 중소업체에 최근 재취업했다. 그는 “눈높이를 낮추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니 일이 풀렸다. 내 인생 제2막 직장생활이 즐겁다”고 말했다.

‘대기업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서울 강남의 의료솔루션 개발회사인 이지메디컴의 장규정(34)씨는 명지대 졸업 후 4년 동안 중소기업 두 군데를 다니며 해외 영업 경험을 쌓았다. 그는 “친구들이 대기업 취직에 몰두하는 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이 괜찮은 중소업체에 자리를 잡은 힘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2011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청년세대가 선호하는 직장은 ▶국가기관(28.7%) ▶대기업(21.6%) ▶공기업(15.6%) 순이고,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은 각각 2.3%와 3%에 그쳤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전국 22개 대학 재학생 574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청년실업의 원인으로 ‘일자리는 있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를 으뜸(77.9%)으로 꼽았다.

의식 변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80% 이상이 대학을 진학하는 학벌 위주 사회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높아진 눈높이에 맞는 괜찮은 일자리는 한계가 있다. 전하진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는 ‘스펙의 역설’을 이야기했다. 학력·연수 등 이른바 스펙의 인플레이션으로 구직자의 눈이 높아지면서 대졸자는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고졸자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취업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 됐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는 “한나라당·민주통합당 기존 양당 정치구도의 붕괴를 불러온 청년층 불만의 핵심은 결국 일자리 문제”라며 “정부와 기업인·구직자 모두 중소기업을 일자리의 보고로 만들 수 있는 방안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움말 주신 분 *가나다순
권대수 중소기업청 정책총괄과장,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연구실장, 김법진 국민대 취업지원실장, 김승일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을식 경기개발연구원 연구위원, 김익성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한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 김현수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남길순 서울시 일자리지원과장, 박신옥 서울고용센터 취업지원팀장, 박영범(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박종남 대한상공회의소 상무, 백필규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송장준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신상철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신정 고려대 경력개발센터장, 심우일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양금승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센터 소장, 오동윤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 오문석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윤윤규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상훈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윤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이윤희 경동대 취업복지처장, 이정훈 경기개발연구원 창조경제부장, 이호성 한국경영자총협회 상무, 전하진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전현호 중소기업중앙회 중견전문인력 종합고용지원센터 부장, 정문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실장,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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