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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땐 인생 낙오자...내가 감독 한다는 게 불가사의

중앙선데이 2012.01.08 00:53 252호 10면 지면보기
‘황제’로 군림하다 마을 이장님이 된 사람이 있다. 지난해 말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은 최강희(53) 감독이다.

‘봉동 이장’서 축구대표팀 사령탑 오른 최강희 감독

최 감독은 2006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전북 현대를 우승시키며 ‘강희대제(康熙大帝)’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국 청나라 황제 강희제와 최 감독의 이름이 같은 데서 나온 것이다. 물론 최 감독의 뛰어난 작전과 선수 장악력이 황제와 같은 포스를 느끼게 한다는 상찬의 의미도 있다.

지금 최 감독의 별명은 ‘봉동 이장님’이다. 봉동은 전북 현대축구단의 숙소와 연습장이 있는 곳(전북 완주군 봉동읍 율소리)이다. 최 감독은 2005년부터 봉동 주민으로 지내면서 2009년과 2011년 프로축구 K-리그 우승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챔피언전이 끝난 뒤에는 봉동 주민들이 갖다 준 밀짚모자와 장화를 신고 ‘이장님 패션’ 세리머니를 펼치기도 했다.

이장님은 앞으로 1년6개월간 봉동을 떠나 있어야 한다. 벼랑 끝에 몰린 한국 축구가 최 감독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조광래 감독이 경질된 대표팀은 2월 29일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지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탈락한다. 축구팬들은 조 감독의 경질과 새 감독 선임 과정에서 나온 대한축구협회의 혼란과 비상식을 강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최 감독의 선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최 감독은 한국 축구의 대표적인 ‘잡초류’다.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서울 우신고를 졸업한 뒤 대학에 못 갔다. 육군 축구팀(충의)에서 간신히 선수 생명을 이어갔다. 20대 후반부터 정신을 차리고 축구에 몰입해 29세 때 처음 국가대표가 됐고,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지난 6일 전주의 한 음식점에서 최 감독을 만났다. 그는 “내 임기는 2013년 6월까지입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더라도 브라질에 가지 않고 봉동 이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단언했다. 국가대표를 은퇴한 박지성(31·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을 다시 부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불가’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쿠웨이트전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시겠습니다.
“대표팀을 맡겠다고 승낙한 날 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만취해 집에 돌아와 누웠다가 ‘내가 미쳤나. 봉동으로 가야 하는데 왜 이런 결정을 했나’ 싶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사우나를 다녀오면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이건 운명이다. 받아들이자’ 하는 생각과 ‘한국 축구가 정신 차리고 집중하면 아시아에서 못 이길 팀은 없다’는 자신감이 생겨났죠. 지금은 담담하게 쿠웨이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감독 선임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는데요.
“처음 제안이 왔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 감독을 뽑는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축구협회가 일찌감치 날 찍어놓고 ‘페인트 모션’을 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거절의 입장을 밝히려고 조중연 회장님과 부회장단을 만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요. 계속 술을 먹이면서 ‘우리는 모두 승부사다. 승부사는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던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겁한 거지’라고 하는 겁니다. 안 맡으면 비겁자가 되는 상황에서 얼떨결에 ‘하겠습니다’라고 한 거죠.”

-대표팀에서 은퇴한 박지성 선수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부정적인 입장이신가요.
“절대 부정이죠. 월드컵 예선 경기를 하려고 은퇴한 선수가 맨체스터에서 날아오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설령 오더라도 100%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 지도 미지수입니다. 조금 부족해도 헌신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합니다. 다만 우리가 월드컵에 진출하면 부담 없는 경기를 골라 은퇴 경기를 열어줄 수 있고, 혹시 본인이 원하면 월드컵 본선에서 국가에 마지막 봉사를 할 수는 있겠죠.”

-이동국(33·전북) 선수는 선발하시는 거죠.
“대표팀은 각 포지션에서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선수를 뽑아야 합니다. 열아홉 살이든 마흔 살이든 나이는 문제가 아니죠. 지금 국내 최고 공격수는 누가 뭐래도 이동국입니다.”

-이동국과 박주영(27·아스널)을 함께 기용할 수 있을까요.
“두 선수가 전혀 다른 유형의 스트라이커라서 함께 나서면 상대에게 큰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박주영이 팀에서 경기에 못 나가면서 심리적으로 쫓기고 있고 경기 체력도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박주영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주장을 다른 선수에게 맡겨야 하는 건 아닌지요.
“주장은 경기 중 교체할 일이 거의 없는 수비수나 골키퍼가 맡는 게 좋다고 봅니다. 박주영이 교체되며 주장 완장을 다른 선수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 분위기가 산만해집니다. 차분하고 냉정한 수비수가 주장 역할에는 더 잘 맞는 것 같고요.”

-이천수(31·오미야)도 대표팀에 뽑을 수 있을까요. 코치 폭행 등 말썽을 일으켜 K-리그에서 쫓겨난 상태인데.
“국민 정서와 프로축구연맹의 결정, 본인의 반성, 그리고 용서 등 전제돼야 할 게 많습니다. 축구를 잘하고 대표팀에 필요하면 누구든 뽑아야죠. 그런데 축구는 골프나 테니스와 달리 단체스포츠입니다. 한 선수 때문에 융화가 깨지면 큰일납니다. 이천수에 대해 동정과 연민을 가질 수도 있지만 냉정해야 합니다.”

최 감독의 또 다른 별명은 ‘재활공장장’이다. 다른 팀에서 버린 선수를 받아들여 보란 듯이 재기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동국·김상식(전북)·최태욱(서울) 등 망가져서 온 선수가 지금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면담을 통해 선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환경을 바꿔주고, 각자에게 필요한 족집게 처방을 내려주는 게 그의 성공 비결이다.

-이동국의 재기 과정은 어땠나요.
“2008년 이동국을 데려온다고 하니까 팬들 사이에서 ‘이장님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그런 퇴물을 왜 데려오나’ 같은 소리가 나왔어요. 그런데 만나 보니 재기하겠다는 간절한 눈빛이 보였어요. 그해 겨울훈련을 하루도 안 쉬었는데도 일본 2부리그와 대학팀 상대로 9경기에서 한 골도 못 넣었어요. 그래도 ‘동국아, 네가 경기를 많이 못 뛰어서 골감각이 떨어져 있는 거니까 경기를 자꾸 뛰면 감각이 돌아올 거다’라고 다독거렸죠. 이동국은 2009년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감독님 살아온 얘기를 하면 선수들이 좋아한다면서요.
“내가 평탄한 아스팔트를 걸어왔으면 얘기가 안 되겠죠. 나는 19세 때 술·담배 하고 싸움질하고 그러다 대학도 못 갔어요. 결혼하고 애 낳고 정신 차려서 친구·술·담배 다 끊고 수도승처럼 운동했지요. 그래서 29세에 국가대표가 됐는데 19세 때 대표가 됐던 내 친구는 독주를 많이 마셔서 29세 때 은퇴했어요. 내가 축구계에 남아서 감독을 하고 있다는 게 불가사의입니다. 나는 영국·스페인·독일·브라질 등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축구 공부를 했습니다. 혼자 호텔방에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지요. 그 정도로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게 프로의 세계입니다.”

-어릴 적 만화가가 꿈이었다면서요.
“만화방에 살다시피 했고,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울산 현대 선수 시절 차범근 감독님 캐리커처를 그렸더니 선수들이 달라고 해요. 뭘 하나 했더니 그걸 벽에 붙여 놓고 다트를 던지더라고요. 하하.”

최 감독은 쿠웨이트를 꺾고 월드컵 최종 예선에 진출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벌써 최종 예선 8경기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 일단 홈에서는 무조건 이기고, 6승 이상을 하는 게 목표다.

만약 월드컵 본선에 올라가고, 팬과 언론이 최강희를 계속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2~3일 안에 계약서에 사인을 할 건데 계약기간이 2013년 6월까지로 돼 있습니다. 나는 브라질로 가지 않고 봉동으로 돌아갑니다. 선수들하고도 약속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 축구가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 브라질 월드컵은 외국인 감독이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나요? 난 아직 월드컵 본선을 맡기에는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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