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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 발명 때

중앙선데이 2012.01.07 22:47 252호 25면 지면보기
사람들은 그를 ‘연구실의 마법사’라고 불렀다. 노력과 땀으로 1093개의 특허를 낸 에디슨은 마법사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한 헨리 스탠리(1841~1904)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을 찾아갔다. 에디슨은 스탠리에게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를 시연했다. 스탠리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누구의 목소리를 듣겠는가”라고 묻자 에디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폴레옹”이라고 답했다. 스탠리는 “나라면 우리 구세주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대꾸했다. 이에 대해 에디슨은 “나는 허슬러(hustler)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허슬러’는 ‘에너지가 넘치는 활동가’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사람’을 뜻한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3> 토머스 에디슨

“발명계의 나폴레옹”
역사를 만드는 게 어떤 구조나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어떤 인물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가 역사를 크게 바꿀지 모른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가 프랑스 땅이 된 1769년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군인으로 활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발명계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토머스 에디슨은 캐나다인으로 태어날 뻔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에 거주했던 에디슨의 아버지 새뮤얼은 1836년 폭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미국으로 이주했다. 에디슨은 20세기 최고의 발명가다. “에디슨이 20세기를 발명했다”는 좀 극단적인 평가도 있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다. 에디슨이 미국에서 태어났기에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과 ‘초강대국 미국’이 동시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에디슨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기간은 대공황 전이다. 당시 미국은 ‘하면 된다는 정신(can-do spirit)’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自手成家·self-made men)로 넘쳐났다. 집안 배경이나 학벌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학교를 중퇴한 에디슨은 12세 때 생업에 뛰어들어 철도 역에서 신문을 팔았다. 15세에는 기차에서 신문을 제작해 판매했다.
에디슨은 정규 교육을 3개월밖에 받지 못했다. 에디슨은 학교에서 끊임없이 질문했다. 당시에는 미국도 암기가 교육의 중심이었다. 선생님은 에디슨이 주의력이 결핍된 저능아라고 판단했다. 에디슨은 집에서도 질문을 쏟아냈다. 자유사상가인 아버지나 한때 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 낸시도 대답해 줄 수 없는 까다로운 질문들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시대에 앞선 생각을 하는 분이었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신뢰와 교육이 에디슨을 발명가로 대성하게 만든 밑거름이 됐다.

열흘에 한 개씩 특허
1847년부터 1931년까지 에디슨은 1093개의 특허를 받았다. 전 세계에서 4위, 미국에서는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성인이 된 후 10~12일에 한 개꼴로 특허를 받은 셈이다. 질적으로도 엄청났다. 전기·전화·축음기·영화·배터리·타자기·시멘트 제조 등 에디슨이 등장하지 않는 20~21세기 문명과 산업은 없다. 에디슨이 처음 발명했거나 혁신적으로 개량한 상품과 시스템이 세상을 바꿨다. 에디슨은 특히 최초의 실용적인 백열전구를 만들었다. 알루미늄박(箔)을 발명했고 119 구급 시스템을 개발했다. 양키스타디움에도 그가 개발한 시멘트 제조 방식이 사용됐다.
에디슨은 시대를 상징했다. 20세기 미국인들은 워싱턴과 링컨, 에디슨의 전기를 읽으며 자랐다. 1983년 미국 의회는 에디슨의 생일인 2월 11일을 ‘발명가의 날’로 선포했다. 1997년 라이프지는 에디슨을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 랭킹 1위 자리에 올려놨다. 에디슨은 세계의 롤모델이 됐다. 1998년 중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미국인’을 물으니 에디슨이 1등, 마이클 조던이 2등, 아인슈타인 3등이었다.
발명왕 에디슨을 미국인들은 ‘멘로파크의 마법사’라고 불렀다. 멘로파크는 그의 실험실이 있던 곳이다. 에디슨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라고 주장했다. 방대한 그의 발명품 목록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에디슨이 대형 연구개발(R&D) 방식의 원조라는 것이다. 그가 구슬땀을 흘리며 연구에 매진한 멘로파크 연구실은 대학·기업의 연구실험실(research laboratory)의 원형이다.
에디슨의 연구 방법은 ‘단순 무식한’ 면도 있었다. 예컨대 축전지의 내구성을 실험할 때에는 사람을 시켜 건물 3층에서 반복해서 떨어뜨리게 했다. 에디슨은 “쓸모없는 실패는 없다”고 주장했다. 해결할 문제가 있으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창고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각종 물질의 5년치를 저장했다. 축전기 개발 과정에서 실험에 1만 번 실패하자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1만 가지 틀린 방식을 발견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무시하고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그의 불신과 고집도 문제였다.

25세도 되기 전에 백발
하루에 18시간씩 연구하는 게 에디슨의 성공비결이었다. 아침만 집에서 먹고 점심·저녁은 회사에서 해결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평생 하루도 일한 적이 없다. 재미 있게 놀았을 뿐이다.” 그는 자기 계발의 열정으로 불탔다. 독학으로 속독법을 배웠다. 덕분에 단어가 아니라 한 줄씩 글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에디슨은 노트광(狂)이었다. 그와 연구원들은 권당 200~250페이지에 달하는 노트 2500개를 남겼다. 에디슨은 25세도 되기 전에 백발이 됐다. 40세도 안 된 에디슨을 사람들은 ‘노대가(老大家·the Old Man)’라고 불렀다.
에디슨에게도 실패나 판단 미스가 있었다. 그가 만든 축음기는 디스크가 아니라 실린더를 저장 매체로 삼은 탓에 경쟁력을 상실했다. 에디슨은 라디오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때 유행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에디슨의 공헌이 없었으면 할리우드도 없었지만 그는 영화의 주된 용도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교육이라고 오판했다. 그가 공들인 ‘말하는 인형’은 내구성이 없었다.
에디슨은 정치인·기업인·학자·언론인 등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중엔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도 있었고 같이 캠핑하러 다닌 자동차왕 헨리 포드도 있었다. 포드는 에디슨을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불렀다. 포드는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 전까지 에디슨의 회사에서 1891~99년 엔지니어로 일했다.
1914년 멘로파크 연구소가 화재로 전소되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포드가 에디슨 앞에 나타나 “더 필요하면 알려 달라”며 75만 달러를 건넸다. 포드는 멘로파크 연구실을 인수해 1929년 미시간주 디어본에 있는 그린필드 빌리지 박물관으로 통째로 옮겼다.
포드는 기자들에게 “에디슨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기업가로서는 세계 최악이다.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포드의 평가는 짜다고 할 수 있다. 에디슨은 기업인으로도 손꼽힌다. 헨리 포드, 존 록펠러 등과 더불어 지금까지 여운을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미국 기업인이다. 에디슨은 14개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가 1890년 설립한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은 지금도 미국 6대 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GE)의 모태가 됐다. 에디슨은 자신이 사회 명사(celebrity)라는 점을 비즈니스에 활용하는 데 능했다. 개인적인 명성을 사업에 이용했다는 점에서 에디슨은 스티브 잡스의 대선배다.
에디슨의 삶은 인간 승리의 상징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앓은 성홍열(猩紅熱)로 이미 청소년기에 청력을 80% 이상 상실했다. 이탈리아의 교육가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가 에디슨을 방문했을 때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에디슨은 피아노를 이로 깨물고 있었다. 진동을 내이(內耳)로 전달해 연주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몬테소리는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몬테소리는 유로화가 등장하기 전 이탈리아 1000리라 화폐를 장식했던 이탈리아의 국민적 위인이다. 청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낙담하지 않았다. 청력 장애가 “보다 효과적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진짜 발명가는 자연이다”
에디슨은 두 살 때 거위 알을 품어 부화시키려고 했다. 두 번째 부인에게는 모스 부호로 청혼했다. 괴짜였다. 인간적 단점도 있었다. 자기 중심적이었고 오만했다. 제멋대로인 데다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특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연구에 매진하다 보니 가정 생활을 등한히 했다. 1년에 단 하루, 7월 4일에만 손자·손녀들과 놀아줬다. 첫 번째 부인 메리는 29세에 사망했는데, 메리와 낳은 세 자식을 에디슨은 철저히 외면했다.
질투심도 강해서 역시 위대한 발명가인 니콜라 테슬라(1856~1943)를 에디슨은 경계했다. 테슬라에게 에디슨은 저렴하고 효과적으로 전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개발하면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을 대체할 교류시스템을 만들었다. 에디슨은 “조크였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뉴욕 타임스는 1915년 에디슨과 테슬라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다는 '오보'를 냈다. 둘의 반목이 수상을 불발시킨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말년에 에디슨은 테슬라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을 아쉬워하며 그를 존중하지 않은 것을 뉘우쳤다.
에디슨은 하늘을 가리키며 “진짜 발명가는 저기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발명은 영적인 행위”라는 말도 했다. 그는 유신론자였지만 그의 신은 자연 그 자체였다. 세상을 뜨기 며칠 전 에디슨은 이 말을 남겼다. “저기는 굉장히 아름답다.” 에디슨이 사망하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제안으로 미국인들은 동부시간으로 밤 10시에 소등했다. 뉴욕 타임스는 20개가 넘는 기사로 고인을 추모하며 그의 삶을 되돌아봤다.
에디슨은 20세기를 열었으나 지극히 19세기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반유대주의 성향은 오점으로 남았다. 에디슨은 유대인들이 점령한 월스트리트 금융가를 혐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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