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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중앙선데이 2012.01.07 21:08 252호 36면 지면보기
학창 시절 시험 시간. 답안지를 절반도 채우지 못했는데 마무리하라는 감독관의 야속한 재촉이 들리면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이런 낭패는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오곤 했다.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연말도 마찬가지다. 올 한 해 내게 주어진 모든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만일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다면.”

강신주의 감정 수업 <3> 토머스 하디와 후회

그렇다. 후회는 항상 이런 문법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법이다. 마치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테스』로 친숙한 작가 토머스 하디가 『캐스터브리지의 읍장』이라는 소설에서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후회’라는 감정이다. 이 작품은 젊은 시절 술김에 저지른 경솔한 결정으로 인생의 여정이 바뀌고 결국 쓸쓸하게 죽어 가는 헨처드라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스물한 살 헨처드는 일자리를 잃은 스트레스로 아내와 다툰 뒤 마을 축제에서 만취하고 만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인생을 바꾸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술만 취하면 허세를 부리던 헨처드가 그만 술집 여주인의 농간에 빠져버리게 된 것. 그는 아내를 경매에 부쳐 5기니를 받고 뉴손이라는 뱃사람에게 팔아버린다. 격분한 아내 수전은 핸처드의 얼굴에 결혼반지를 집어던지고는 갓난아기 딸을 데리고 뉴손을 따라 가버린다.

술이 깨고 나서 핸처드는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아무리 후회한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순 없다. 아내는 이미 뉴손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난 뒤였으니까.하지만 홧김에 뉴손을 따라나선 수전도 머지않아 후회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에 대한 애정이 남아서였을까, 아니면 살아갈 일이 막막해서였을까. 수전이 18년 만에 딸 엘리자베스 제인을 데리고 캐스터브리지의 읍장으로 출세한 헨처드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둘은 재결합하는 데 성공한다.

아내를 잃고 난 후 깊은 참회의 마음으로 금주를 맹세하고 성실하게 부와 명예를 쌓아올린 헨처드는 처음으로 죄의식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헨처드에게는 더 큰 불행의 서막이었다. 자신의 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엘리자베스 제인이 뱃사람 뉴손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헨처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내의 어리석은 선택도, 엘리자베스 제인의 탄생도 모두 스물한 살 때 저지른 자신의 실수 때문에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전이 헨처드를 떠난 것, 그리고 수전이 뉴손과 살면서 엘리자베스 제인을 낳은 것, 이 모든 것이 정말 헨처드만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헨처드가 아무리 자신을 경매에 부쳤다 할지라도 수전이 좀 더 신중한 여자였다면 철없는 남편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또한 친딸이 죽지 않고 살아서 재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비극은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처자식을 돌보아야 했던 헨처드를 실직으로 내몬 당시 사회 구조 때문에 예정돼 있던 것은 아닐까. 분명 일자리를 잃지 않았다면 헨처드가 좌절해 수전과 다투거나 과음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후회’라는 감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자신은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영민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이 점을 간과할 리 없다. “후회(Poenitentia)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에티카(Ethica)』중에서)

‘후회’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 왜 그럴까. 만약 어떤 행위가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후회라는 슬픈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불운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오만함 중 이보다 더 큰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모든 불행을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런 사람은 후회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결국 『캐스터브리지의 읍장』 에서 토머스 하디가 헨처드의 기구한 삶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후회라는 감정의 내적 메커니즘이 아닐까. 지나친 후회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하면서 말이다.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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