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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중앙선데이 2012.01.07 17:37 252호 8면 지면보기
서예삼협파주대전:2월 29일까지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 북하우스, 갤러리 한길 전관, 문의 031-955-2041
서예 삼협(三俠)의 글씨 대결
황량한 파주벌에 나붙은 포스터부터가 심상찮다. 한 사람은 죽창으로 당장이라도 찌를 태세다. 또 한 사람은 낫과 호미로 공격과 동시에 되받아칠 요량으로 몸을 잔뜩 낮추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도리깨로 타작을 하듯 내려치고 있다. 그야말로 ‘전시(展示)’가 아니라 ‘전시(戰時)’다. 하석·학정·소헌의 삼파전(三巴戰)은 진검승부보다 더 살벌한 ‘진필승부’다. 이름하여 ‘서예삼협파주대전(書藝三俠坡州大戰)’이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의 집필(執筆) 자세가 바로 작서(作書) 태도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점이다. 서예의 첫째 가는 금과옥조가 “글씨는 그 사람”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그 사람이 바로 글씨이기도 하여 입가에 미소가 돈다.

지금 왜 서예인가 -‘파주삼협대전’을 보고


얼떨결에 잡은 하석의 붓은 차라리 서슬퍼런 칼이다. 누구든지 찔리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야 만다. ‘災(재)’ ‘門(문)’ ‘巢(소)’와 같은 작품에서 봐도 갑골문과 목간에서 배태된 도법적(刀法的) 필획은 행초는 물론 문자추상까지 관통하고 있다. 반면에 소헌의 필획은 이런 칼날마저 가슴 깊이 품고 있다고나 할까.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隋處樂(수처락)’이나 ‘逍遙一世之上(소요일세지상)’을 보자. 방원(方圓·모나고 둥근)이 뒤섞인 장단(長短), 경중(輕重), 지속(遲速·느리고 빠른), 곡직(曲直·굽고 곧음)의 필획이 각체(各體)로 혼융 발전되면서 언제 어디서 얼마만큼 내려칠지 종잡을 수 없다. 작대기를 곱으로 쓰는 도리깨 타법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옛날 촌에서는 늑대를 잡을 때 도리깨를 쓴다. 영리한 늑대는 작대기 길이만큼 도망가는데, 도리깨는 펴면 길이가 그 배가 되어 늑대는 맞아 죽고 만다는 것이다). 즉흥적이면서도 고도의 계산을 깔고 있는 소헌의 공간경영은 이미 그림보다 더한 글씨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에 비하면 학정의 필획은 리드미컬하다. 칼날을 드러낼 때는 사정없이 드러내고 감출 때는 감추면서 한 손으로 남도의 판소리 가락 같은 유장한 행초를 타다가 또 한 손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무조음악(無調音樂)과도 같이 서화일체(書畵一體)의 현대적 재해석을 감행하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서 급기야 먹을 들어붓고 뿌려낸 ‘紅梅(홍매)’는 그림이 아니라 차라리 눈밭에 피를 토하고 있다. 현대 서구의 액션페인팅이 전적으로 먹물의 우연성에 기댄 것이라면 학정의 문인화는 그냥 필연이 아니라 그래서 우연 너머에 있는 필연인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 공모전의 한계를 넘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이들 삼파전에서 누구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파주대전 자체가 이미 이 시대 서예판에서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우선 전시, 아니 전쟁 자체가 서단 내부에서 발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주동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서예야말로 인문학의 꽃 중에서도 꽃’이라는 신념을 실천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일종의 인천상륙작전 같은 허를 찌르는 기습공격으로 서단을 넘어 우리시대 식자층을 통타하고 있다.

그 다음은 이 꽃도 그냥 핀 꽃이 아니라 100년 만에 핀 ‘붓 꽃’이라고나 할까. 서예문화에 생소한 관객들마저 붓 한 자루로 이렇게 각양각색의 천변만화하는 필획(筆劃)의 각축장을 목도할 수 있는 곳이 파주대전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즈음 “서예가 죽었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공모전’ 천국이 된 한국 서단의 붓이 모두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국전(國展)’ ‘선전(鮮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역사는 근 100년을 헤아린다. 지리멸렬한 그들만의 리그에 대중들이 등을 돌린 지는 언제인지도 모른다. 파주대전은 바로 이와 같이 매너리즘에 빠진 천편일률적인 필획을 여지없이 때려부수고 있다

하석이 원시회귀(原始回歸)로 마치 신화시대와 같은 요즈음 문자·영상시대와 직통하고 있다면, 학정은 정통과 전위를 하나로 서화일체(書畵一體)의 작두날을 타고 있다. 소헌은 혼융미학의 결정(結晶)이라 할 파체(破體·전예해행초 등 여러 서체가 한 글자 또는 한 작품에 뒤섞여 나오는 글자체) 서예로 그림의 경계까지도 넘나든다.
서예 역사의 고비마다 라이벌 전쟁이 있어왔고, 이들이 다시 서예 역사를 이끌었다. 하지만 삼협전의 전사는 각각 마치 조선후기 서예판 한 장면들의 주인공들을 보는 듯하다. 허목이 ‘미수전(眉<53DF>篆)’으로 행초까지 일관하면서 ‘양송체(兩宋體)’의 거두인 송시열과 맞장을 뜨며 뒤흔들었다면, 오체(五體)겸수를 주창·실천하면서 또 다른 길을 간 인물이 ‘백하체(白下體)’와 ‘원교체(圓嶠體)’를 구가한 윤순과 이광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진(眞)’을 화두로 조선 서예의 향방을 고민했다는 측면에서 ‘왜 지금 서예인가’를 묻는 지금도 300년 시차를 뛰어넘어 유효하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로니컬한 사실 하나는 하석·학정·소헌 또한 타도 대상으로 전락한 공모전 출신임과 동시에 수(守) 파(破) 리(離)의 궤적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주동이 되어 그 판을 뒤집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각각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장들이라 할 강암 송성룡, 송곡 안규동, 일중 김충현 문하에서 잔뼈가 굵은 간판스타들이 아닌가.
얼마나 완전히 스승을 깨고 떠나느냐가 이들의 궁극적인 화두이겠지만 익히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서숙’과 ‘공모전’은 호불호나 순기능과 역기능을 떠나 ‘식민지’와 ‘서구화’로 압축되는 근현대 한국의 서예역사를 지탱해 온 양대 축임은 분명하다. 이 두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 이 땅에서 서예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파주대전은 요컨대 공모전과 서숙이라는 숙명과도 같은 100년 질곡(桎梏)의 터널을 제대로 ‘살아서’ 빠져나온 삼협들이 벌이는 한바탕 굿판이기도 한 것이다.
왜 두드리지 않고 쓰는가

그렇다면 왜 지금 ‘쓰기’인가. 그것도 붓과 먹은 물론 사실상 한자(漢字)도 일상 문자생활에서 다 사라지다시피 한 때가 지금 아닌가. 더욱이 문자 영상시대 키보드가 주도하는 ‘두드리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쓰기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새삼 말하지만 ‘쓰기’는 응당 붓의 산물이다. 붓 이전의 한자가 만들어진 때 칼의 ‘새김’부터 줄잡아 3000여 년이 훨씬 넘는 역사가 ‘쓰기’다. 이에 비한다면 한 점도 안 되는 30년 남짓한 ‘두드리기’의 역사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졸지에 맞이한 문화다.
인류학에서 말하듯 사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3만5000여 년 전에 시작된 크로마뇽인의 말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말을 시각적 기호로 형상화해 낸 것이 바로 역사와 선사를 구분짓는 문자(文字)다. 그렇다면 ‘쓰기’라는 것은 곧 자의식(自意識)의 발로로서의 ‘언어’와 역사적 인간으로서 나의 존재 이유가 되는 ‘문자’가 하나 되는 지점에서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사실 붓과 무관하게 보이는, 그래서 인간이 아닌 기계의 이미 만들어진 키보드의 ‘두드리기’도 그 아버지뻘인 ‘쓰기’의 연장선상에서나 확인된다.
그래서 ‘쓴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시(詩)이고 그림이자 노래와 춤이고, 종교이자 역사가 되는 것이다. 추사에게 ‘쓰기’는 필묵의 유희(遊戱)이자 선열(禪悅)의 기쁨이었고, 퇴계에게 ‘쓰기’는 수행이자 도학공부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정보가 관건인 ‘두드리기’ 쪽으로 진화해도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인간의 미묘한 감정변화는 물론 무의식(無意識) 세계를 일필휘지의 붓이 아닌 자판으로는 온전하게 담아낼 재간은 없어 보인다. 아니할 말로 “붓을 놓는다”는 것은 정신줄을 놓는 것이자 우리 미학 역사의 고갱이를 송두리째 버리는 것과 다름 아니다. 문자 영상시대, 덮어놓고 두드리지만 말고 쓰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씀’으로써 비로소 실존(實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파주대전은 서예 안의 문제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전황에 따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자 영상시대 주적인 자판(字板)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모종의 선전포고로도 보인다. 그 격전지는 아무래도 디자인, 현대미술, 서화가 필묵과 만나는 지점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전장(戰場)에서 만난 하석은 죽창 같은 필획으로 디자인계를 점령하고 있고, 소헌은 도리깨 타법으로 현대미술을 넘보고 있다. 학정 또한 두 손의 붓으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서화를 하나로 녹여내고 있다. 좌우지간 파죽지세(破竹之勢)의 파주삼협대전의 전황은 한·중·일 삼국은 물론 일촉즉발의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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