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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3.칼을 베어버린 꽃잎 (7)

중앙일보 2012.01.07 01:43 주말섹션 10면 지면보기
그날 밤부터 최이의 몸에 뚜렷한 변화가 찾아왔다. 속이 편안한 상태에서도 양기가 불끈불끈 솟아났던 것이다. 오랜만에 젊은 애첩의 방을 찾은 그는 질퍽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이른 아침 뒷간에서 침을 듬뿍 바른 좌약 한 알을 하초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며느님의 지혜가 이인에 가깝습니다
세월을 두고 야금야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 여인!
지양의 얼굴에는 원한도 미움도 벗어놓은 처연함 같은 게 묻어 있다
최항은 사랑에 겨운 여인이 내민 찻잔이 독배(毒杯)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조반 수저를 놓기 바쁘게 봉의 영감이 찾아왔다. 두 노인은 밝은 표정으로 마주앉았다.



 “소생은 탁월한 효과를 봤습니다. 공께서도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여부가 있겠소.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는걸. 허허허.”



 최이의 말에 봉의 영감이 박장대소를 한다. 그 사품에 복두가 벗겨질 뻔했다.



 “며느님의 지혜가 이인(異人)에 가깝습니다.”



 “그렇지. 화타, 편작도 생각지 못한 일이야.”



 “노년의 홍복이십니다.”



 “아무렴. 그나저나 그 독극물 성분은 알아냈소?”



 의심 많은 최이가 두 눈을 조였다.



 “그게 워낙 생소해놔서요. 반하(半夏)도 아니고 비소도 아니고 도대체 알 수가 없었나이다. 천축국 약재는 써보질 못했으니까요.”



 봉의가 난처한 기색을 보인다.



 “딱하시오. 상약국 최고 책임자가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되오?”



 “몽골과의 전쟁이 벌어진 이래 천축국과는 교역이 뜸해져서요.”



 “약 조각을 잘 간수하고 있다가 꼭 알아내시오.”



일러스트=이용규 buc0244@naver.com




 올 때와 달리 잔뜩 주눅이 든 봉의가 물러가자 최이는 만종과 최항, 최의를 정방에 불러 모았다. 측근 무신들과 문신들 외에 아직 나이 어린 손자 최의를 배석시킨 건 경륜을 쌓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큰일 처리하는 걸 곁에서 지켜보면 식견이 높아진다. 남들보다 일찍 정치에 입문하는 셈이다.



 조세 거둬들이기와 군사조직 관리가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민란이 끊이지 않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조세가 덜 걷히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과 향, 소, 부곡의 재정이 바닥났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그런 지역은 세금을 걷기는커녕 중앙에서 원조를 해줘야 백성이 말을 들어먹는다는 것이었다.



 “이 판국에 그런 재화가 어딨어. 대장경 판각불사 경비 대주기도 벅찬데. 말 안 들어먹으면 군사를 보내 버르장머릴 뜯어고쳐줄 수밖에 없지.”



 최이가 지휘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딱딱 소리 나게 쳐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세에 불과했다. 중앙에서 지방에 군사를 파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도를 지키는 3만의 군사는 단 하나도 빼낼 수 없었다. 지방군이나 최전방인 북계와 동계를 지키는 주진군도 여유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몽골군이 쳐내려오는 길목인 북계는 수자리 살러 왔다가 도망치는 군졸들까지 속출했다. 전방에 생긴 궐석도 못 채워주는 처지에 등 돌린 남녘 지방을 정벌하자고 군사를 빼낼 수는 없었다.



 “전시니까 그러려니 해야지요. 자칫 안팎으로 적을 만들까 저어됩니다.”



 최이의 심복 송길유가 제법 사려 깊은 얘기를 했다.



 “도방의 최정예 부대가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득달같이 내달아가서 반민들을 토벌할 수 있고 말고요.”



 정방 회의에 참석한 궁궐 전전승지 김준이 아부를 했다.



 “과람한 말씀이오. 진양부를 지키는 도방의 군사를 어디로 돌린단 말이오?”



 유경이 똑 부러지게 반대하고 나섰다.



 “옳으신 말씀이오. 이곳 진양부를 지키는 도방 군사 수효가 줄어들면 당장 강도의 반민들과 반군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오.”



 유천우도 유경 편을 들었다. 30만 강도 백성 가운데 절반 정도는 무인정권 반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수만 명이나 되는 승려 대부분이 무인정권에 적대적이었다. 승려들은 아무 때고 무장만 하면 반군이 될 수 있었다.



 “내 말은 본때 보여주기로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였소이다.”



 김준이 최이와 최항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최이는 건장한 체격, 잘생긴 외모의 김준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감히 자신의 애첩과 놀아난 적이 있는 사내였다. 거미줄처럼 쳐놓은 감시망도 소용없었다. 그 많은 첩을 일일이 감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꼭 요망한 계집이라서가 아니었다. 사람은 생물이다. 저마다 머리가 있고 발이 있었다. 아무리 거미줄 같은 감시망을 쳐놔도 따돌리자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었다. 김준에게 반해버린 애첩은 포목점 주인을 매수해서 밀회했다. 밀회가 잦아지자 밀정이 냄새를 맡았다. 간통하는 포목점 쪽방을 덮쳤다. 그 자리에서 애첩의 목을 벴다. 김준은 개처럼 기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사위 김약선이 떠올랐다. 그렇게 신임했던 후계자 사위를 간통죄로 몰아 죽인 게 후회막급이었다. ‘목숨만 살려주시면 무엇이건 다 하겠나이다.’ 김준은 애첩의 핏방울이 떨어지는 칼끝을 붙들고 맹세했다. 천하의 불곰 최이가 참을 때도 있었다. 그는 거꾸로 솟는 피를 가까스로 다스렸다. 자신의 애첩과 놀아난 가신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이참에 충복 하나를 얻자고 다잡았다. 김준의 목숨을 살려주고 얼마간 유배 보냈다 도로 불러들였다. 이후로 김준은 길들여진 사냥개가 되어 궐내 속사정을 빠짐없이 물어왔다.



 “세수가 줄어들었다면 고통을 분담해야지. 관리들 녹봉을 줄이는 도리밖에 없겠군.”



 최이의 말은 곧 법이었다. 당장 다음 번 녹봉부터 깎기로 했다. 어전 회의는 형식적 절차였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심한 민정시찰을 위해 도방의 병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정보원과 자객을 증원하자는 얘기였다. 그만큼 더 경비가 들었지만 최씨 가문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추가되는 경비만큼 더 걷으면 그만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회의를 마치세. 천기 스님이 남녘 답사에서 돌아왔다고 하니 우리 만종 스님은 나와 함께 선원사에 가보도록 하십시다.”



 최이는 쌍두마차를 준비시켰다. 만종 스님과 함께 타고 갈 마차였다.



 정방을 나온 최항은 자신의 집으로 건너와 지양의 처소에 들렀다. 우악스러운 사내들 틈에 섞여서 쟁론을 벌이다가 아리따운 지양을 대하자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방안을 채운 그윽한 향기는 격조를 더했다.



 “날도 더운데 차를 끓여 마실 필요가 뭐 있소. 냉수나 주시구려.”



 그는 연근차를 우려내려는 지양을 말린다. 아버지와 봉의 영감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서 꺼리는 것이었다.



 “날이 더울수록 더운 차를 마셔야 몸에 좋아요.”



 지양은 굳이 마다하는데도 연근차를 우려내 디밀었다. 최항이 주저하는 기미를 보이자 지양은 그 잔을 가져다가 후루룩 마셔버린다. 그런 다음 그 잔에 다시 연근차를 따라 최항에게 올린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선이 뚜렷한 여인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린다. 세월을 두고 야금야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 여인! 지양의 얼굴에는 원한도 미움도 벗어놓은 처연함 같은 게 묻어 있다. 최항은 사랑에 겨운 여인이 내민 찻잔이 독배(毒杯)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가져다 혀끝에 적신다. 구수한 맛이 돈다. 연향을 음미하며 마저 털어 넣는다.



 “서방님, 소첩은 제 모든 걸 서방님께 바치기로 한 여인이랍니다. 제가 못 먹는 건 절대로 서방님께 올리지 않아요.”



 다소곳한 지양이 최항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속내를 들킨 최항은 다시 찻잔을 비운다.



 “난 임자를 믿어. 아버님께서도 임자 칭찬이 자자했거든.”



 “아버님이 산신제 만수받이를 제게 지시하셨어요. 흑련 어머니께 함께 가시지 않으려우? 수레 석 대는 움직여야 한답니다.”



 “알았소. 오늘은 내가 임자의 방울이야. 하하하.”



 두 손을 흔들어 보인 최항은 거침없이 찻잔을 비운다. 미량의 맹독성 유도화 추출물이 녹아 있는 이 차는 애욕의 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욕에 섞은 이 맹독을 피할 세속 인간은 아무도 없다.



 최이와 만종이 탄 마차가 중성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 최항과 지양의 마차는 집을 나서서 도성 서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원앙새처럼 다정히 앉은 둘은 줄곧 손을 잡고 있었다.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는 듯이. 지양이 고려산 밑 흑련의 집에 최항을 대동하고 가는 건 믿음을 쌓기 위함이었다. 아버지 최이가 각별히 아끼는 무당이 흑련이다. 그런 흑련이 지양을 수양딸로 삼고 깊은 속정을 주는 걸 옆에서 목격하면 남은 의심이 말끔히 사라질 거였다.



 최이와 만종이 탄 마차가 선원사 앞에 당도했다. 진명국사와 수기, 천기를 비롯한 대장도감 소속 승려들과 대중 이백여 명이 화려한 가사장삼을 걸치고 나와 환영했다. 선원사는 최이가 세운 그의 원찰이었다.



 “오, 천기 스님! 원행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시었소이까?”



 최이는 천기 스님의 두 손을 부여잡고 치하한다. 그사이 만종도 진명국사와 수기 도승통의 환대를 받는다. 진명국사와 만종의 장삼은 대중 스님들 가운데 쌍벽을 이룬다. 홍포에 금실로 연화문과 모란문, 국화문 등을 수놓아 눈이 부셨다. 반면에 수기의 가사장삼은 낡고 빛이 바랬다.



 완만한 산중턱 금당에 들어가 부처님을 뵌 최이가 금당 뜰에서 앞을 조망하고 섰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골 너머 안산이 옥대를 풀어놓은 형국이다. 이른바 일자문성(一字文星)이다. 이런 안산을 갖춘 명당 자리에서는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는다. 정성스레 판각한 경판도 모시고 자손들 벼슬길도 도모할 수 있다면 그만 아닌가. 최이는 저절로 흡족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나지막한 산과 들, 바다가 가슴에 안겨 들어온다. 편안하면서도 천하를 얻은 포만감을 준다. 금당 앞에서 주변 풍광을 둘러보던 최이는 안내하는 일행을 따라 금당 뒤로 돌아서 판당으로 들어간다.



 “경판이 이렇게 뒤틀려 간답니다.”



 수기가 시렁에서 경판 한 장을 꺼내 보인다. 최이가 씨무룩한 얼굴로 뒤틀린 경판을 살펴본다. 수기가 다른 경판들을 더 빼낸다. 뒤틀린 경판이 여러 장이다.



 “심각하군. 모서리마다 이렇게 구리로 마구리까지 만들어 박아도 소용이 없을 정도니.”



 “그렇습니다. 역시 바닷물이 가깝고 안개가 많이 끼는 관계로…. 그래도 판당이 통풍을 잘 시키는 구조로 지어져서 이만하지요.”



 선원사 주지 진명국사다. 그는 판당 남쪽과 북쪽 벽에 뚫린 통풍구를 가리켰다. 위아래 통풍구 크기가 서로 달랐다. 바람을 잘 순환시켜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했다.



 “남해분사도감 판당에도 뒤틀림 현상이 생긴다고 합니다. 얼마 전 지밀 승정이 단속사를 거쳐 가면서 일러주더군요.”



 이번에는 만종이 나선다.



 “아 참, 그 지밀이라는 승정과 인보 스님은 언제 올라오오?”



 최이가 수기에게 묻는다.



 “남녘 공방들을 쭉 둘러보러 갔으니까 좀 더 걸릴 겁니다. 늦어도 열흘 안에는 귀환하지 않을까 싶군요.”



 수기의 어조는 태연했다. 인보가 최이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을 지레짐작하고 있는 수기였다. 돌아와서 저간의 사정을 속속들이 고할 테지만 미리부터 경교 사건을 흘려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지밀의 말을 들어본 다음 경중을 따져서 보고해도 될 일이었다.



 “지밀 승정이 워낙 깐깐해서 조사야 잘하고 오겠지요. 어쨌든 판당 지을 터를 잡아서 이운(移運)해야 한다는 건 확실합니다, 아버님.”



 이제껏 듣고만 있던 만종이 오늘 모인 목적을 말했다.



 “천기 스님의 고견부터 들어봐야 옳겠군.”



 최이가 앞장서 판당을 나선다.



 “주지스님 방에 가 계십시오. 준비된 지도와 도면들을 가지고 곧 올라가겠나이다.”



 호리호리한 천기가 대장도감 사무소 쪽으로 잰걸음을 옮긴다. 사무소에서 둘둘 말아놓은 자료 뭉치들을 챙긴 그는 따라나서려는 시자를 물리치고 주지 방으로 간다.



 다과시간이 끝나자 천기가 지도 한 장을 펼쳤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형국의 첩첩산중에 용의 눈처럼 생긴 절터가 나타났다.



 “우리 고려국에 이런 데가 있었던고?”



 말려 올라가는 지도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최이가 놀란다.



 “삼재(三災:물·불·바람의 재해)가 들지 않는다는 천하명당 가야산 해인사입니다.”



 천기는 지도 오른쪽 하단 사하촌 각사마을을 짚어 보인 다음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곳 계곡 입구에서 수십, 수백 번 산자락이 휘감고 있지요. 병란이 닥치더라도 끄떡없어요. 소수의 승병만으로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까요. 대적광전 바로 위쪽에 널찍한 터가 있었사온데 판전 후보지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봅니다.”



 천기는 대구 공산 부인사 사정도 자세히 일렀다. 공산보다 가야산이 훨씬 수승한 보장지처임을 알 수 있었노라고 역설했다.



 “대사님들 의견은 어떻습니까?”



 최이가 수기와 진명국사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전쟁 통에 이처럼 어렵게 새긴 경판을 좀과 습기에 내줄 수는 없지요. 하루바삐 해인사에 장경판전을 짓고 일목요연하게 진장(珍藏)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대장도감 최고 책임자인 수기는 이미 천기와 뜻을 모은 처지였다.



 “빈도는 반대요!”



 진명국사가 단호하게 외쳤다. 너무 단호해서 좌중이 모두 놀라고 말았다.





김종록

일러스트=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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