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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판사의 길, 이 한 장의 사진에 있습니다

중앙일보 2011.12.30 00:00 종합 22면 지면보기
권석천
사회부문 기자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일본 도쿄 도심의 호세이(法政)대학 연구실이다. 검은색 스웨터를 입고 서 있는 이는 형사법 교수 기타니 아키라(74·木谷明). 그의 뒤편 책꽂이엔 A4 용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부부 살인사건, 오사키(大崎) 사건, 무라키(村木) 사건…. 현재 재판이 끝났거나 진행 중인 사건 관련 자료들을 쌓아올리면서 분류표 삼아 종이를 붙여놓은 것이다.


판사 출신 도쿄 호세이대학 기타니 교수 연구실

 기타니 교수는 재판관(판사)이었다. 최고재판소 조사관, 지방재판소 소장, 고등재판소 부장판사. 25세부터 62세까지 37년 동안 법복을 입었다. 그는 판사의 길을 끝까지 걷길 바랐다. 정년(65세)을 앞두고 꿈을 꺾은 건 끔찍한 요통이었다. “법정에서 재판을 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의 눈동자에 회한이 피어올랐다. 재판 자료 모으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본 도쿄의 호세이(法政)대학 ‘80년관’ 연구실. 기타니 아키라(木谷明) 교수 뒤편으로 사건 이름을 적은 A4 용지들이 보인다. 사건 관련 기록들을 분류하기 위해 붙여놓은 것으로 재판을 향한 그의 집념이 담겨 있다. [도쿄=권석천 기자]


 #기타니 교수를 기자에게 소개한 건 한 일본 판사였다. 기자가 연구실을 방문하는 날 아침, 그는 서툰 한국어로 전화를 걸어왔다. “교수님은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선배 판사입니다. 인터뷰 시간에 늦지 않게….” 결례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당부였다. 순간 도쿄에서 만난 판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판관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를 물었을 때였다. 그들은 “수습 시절, 하루하루의 재판에 보람을 느끼며 평생 묵묵히 일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라고 답했다. 선·후배 간의 존경과 믿음이 일본 법원을 지키는 씨줄과 날줄이었다.



 #2011년은 우리 법원이 맨 얼굴을 드러낸 해였다. 부적절한 법정관리로 물의를 빚은 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가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에 섰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선 판사들이 대통령을 원색적 용어로 조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치인들이 검찰 수사에 기대며 서초동의 질서에 편입됐듯 판사도 여의도 질서에 포섭되기 시작한 것이다. 판사들은 법원장 경고를 받고도 “선의로 하신 말씀이다” “징계는 아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후배들의 일탈을 꾸짖는 선배들의 묵직한 목소리는 울려퍼지지 않는다.



 어쩌면 판사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선·후배 의식은 이미 깨졌는지도 모른다. 후배들은 때가 되면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고 법정에 들어오는 선배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 2009년 ‘촛불집회 재판 개입’ 논란 이후론 법원장도 판사들 앞에서 말조심하는 시대가 됐다. 한국 판사의 길은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전관예우’ 시비와 정치성 논란이라는 동전의 앞뒷면 속에.



 #사진을 찍으며 기타니 교수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한 일본 드라마에 ‘판사는 공평, 검사는 정열’이란 대사가 나오던데, 판사는 정열과 거리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정열 없이는 절대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검사처럼 ‘나쁜 놈들 다 처벌하겠다’는 식이어선 곤란하지요. 정열을 냉정한 방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한국의 ‘가슴이 뜨거운’ 판사들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묻고 싶어졌다.



권석천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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