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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비관적이니까 생존이다

중앙일보 2011.12.30 00:00 종합 33면 지면보기
정선구
산업부장
두산이 묻고 맥킨지가 답했다.



 “우리 괜찮습니까.”



 “음…. 이대로라면 6개월 안에 망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룹이 붕괴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두산이 그룹의 향방을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 맡겼고, 맥킨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의 일이다. 날카로운 면도날 위에 선 국내 최장수 기업 두산은 이후 일대 변신을 꾀한다. 먹고 마시는 업종을 버리고 중후장대 기업을 사들였다.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과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수가 대표적이다. 만약 뼛속까지 확 바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국내 최고(最古) 그룹의 영예는 다른 데로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존의 힘은 역설적이게도 비관론에서 나온다. 긍정은 해이(解弛)요 낙관은 나태(懶怠)다. 미국의 유명한 젊은 목사 조엘 오스틴은 ‘긍정의 힘’을 주창했지만, 기업들엔 오히려 사치다. 돌이켜보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삼성은 늘 긴장 상태였다. 경제잡지 포춘(Fortune)은 2007년 7월 세계는 ‘사상 최대 초경제 호황(the greatest economic boom ever)’이라고 보도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고 낙관했다. 그때도 삼성은 “잔치는 끝났다”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일부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직책을 내놨다. 정말 앞날을 보는 눈이 있는 건가. 세계 금융위기는 이듬해 곧바로 찾아왔다. 지금 삼성전자 매출은 애플의 두 배요, 구글의 네 배나 된다. 그런데도 이건희 회장은 올해 일본 출장길에서 “더 배울 게 많다”고 했다. 칠순 때는 “정신 안 차리면 또 뒤처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도 그랬다. 올해 내내 ‘궁변통구(窮變通久)’를 달고 살았다. “궁하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두루두루 통해서 오래 간다”는 뜻이다. 그 덕일까. 올 한 해 세계의 유명 철강회사들이 줄줄이 타격을 받았을 때 상대적으로 선방했다.



 몇 년 동안 ‘기업인’ 안철수와 주고받은 e-메일을 뒤져보다가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표현을 발견했다. 짐 콜린스의 저서 『Good to Great(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 나오는 이야기다. 스톡데일은 미국의 전쟁영웅. 베트남 포로수용소에서 8년간 고문을 받으면서도 많은 미군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인물이다. 처절한 수용소에서 스톡데일은 통념을 깨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존자들은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라는 사실을. 낙관주의자들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러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에는 나갈 수 있을 거야”라고 기대했다. 이러기를 여러 번. 낙관론자들은 결국 상심해 죽었다. 반면 현실주의자들은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절대 나가지 못할 거야”라는 각오를 다지며 살아남았다. 안철수는 e-메일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결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과 눈앞의 냉혹한 현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제 새해가 이틀 남았다. 자존심 상할지라도 용의 비상을 꿈꾸기 전에 이무기 신세임을 먼저 깨닫는 각오가 우선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젊은 경영인들은 절망에서 경영을 배운다. 커피와 외식업계 대박 신화를 일구고 있는 김선권 카페베네 대표는 비가 오면 천장에 실을 매달아 빗물이 타고 내려오도록 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이렇게 절규했다. “왜 나만 찢어지게 가난한 건가. 나보다 더 처참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그래서 그의 아홉 가지 다짐 중 으뜸이 생존, 그저 살아남고 싶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보듯 결핍과 생존욕구가 성공 원동력이다. 이미 Good에서 Great가 된 삼성전자조차 내일의 생존을 위해 오늘을 비관한다.



정선구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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