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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양녕대군과 김정남

중앙일보 2011.12.28 00:00 종합 33면 지면보기
공자는 『논어』 ‘태백(泰伯)’에서 “태백은 지극한 덕〔至德〕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고 높였다. 태백은 주(周)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남이지만 셋째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 주 문왕〔文王〕)에게 성덕이 있는 것을 알고 스스로 도주해 왕위를 넘긴 인물이다. 덕 중에서 가장 지극한 덕이 왕위 양보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 들어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을 이런 지덕(至德)으로 높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숙종 1년(1675) 우의정이던 양녕의 외손 미수(眉?) 허목(許穆)은 양녕대군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하면서 그 이름을 ‘지덕사(至德祠:서울시 동작구 상도동)’로 지었다. 허목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에는 “아우 충령대군(세종)이 나면서부터 성덕(聖德)이 있어서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가니 세자가 마음으로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도망가서 사양했다”면서 이후에도 “사냥하고 말 달리고 술 마시고 취하는 것으로 미친 것을 자임했을 뿐 다른 일은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종 13년(1876) 양녕의 후손들이 편찬한 『지덕지(至德誌)』에도 폐출당해 도성문을 나서면서 손뼉을 치고 웃으며 “충령이 과연 나에게 속았구나”라고 ‘가전(家傳)’을 인용해 마찬가지로 서술했다.

 정조는 재위 13년(1789) 지덕사에 사액(賜額)하면서 직접 ‘지덕사기’를 지어 폐위 전까지 “술과 음악과 기생 속에서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10년을 하루같이 보냈다”면서 “오조(五朝)를 섬기면서 70 가까이 장수했지만 그때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도 그의 깊은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이가 드물었다”고 서술했다. 조선 초기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효령대군에게 술과 고기를 사양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다”고 웃으며 답했다고 전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정조가 이때(1789) 효령대군을 모신 청권사(淸權祠)에도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 무렵이 되면 300여 년 전 양녕이 폐출된 실록의 기록을 ‘일부러 미친 것’으로 해석해도 받아들여지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북한의 권력을 승계한 삼남 정은 못지않게 장남 정남의 앞날도 큰 관심거리다. 그가 일부러 사양했는지 난행 때문에 탈락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실상 왕조 체제에서 왕의 형처럼 어려운 자리가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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