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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⑬ 산둥성 지난(濟南)

중앙일보 2011.12.28 00:00 경제 13면 지면보기
전설 속의 명군 순(舜)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농사를 지었다는 곳. 중국을 대표하는 월드스타 궁리(鞏),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의 청문회에서 강스파이크로 남편을 보호한 웬디 덩(중국명 鄧文迪)의 고향. 인천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한국과 가깝다는 산둥(山東)성의 중심 지난(濟南)시 일대로 떠나보자.


인천 닭울음 소리 들린다는 이웃 도시 … 강태공·관중·공자를 만나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천하제일천’ 칭호 받은 샘의 도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管仲)은 춘추질서의 설계자이자 중국 역사상 재상(총리)의 전범이다. 사진은 2004년 산둥성 린쯔(臨淄)에 조성된 관중기념관. [중앙포토]


지난은 ‘샘의 도시(泉城)’다. ‘집집마다 샘물이 솟고, 대문마다 수양버들(家家泉水, 戶戶垂楊)’이란 말처럼 샘과 버들의 고향이다. 남순에 나선 청(淸) 건륭제(乾隆帝)는 지난의 표돌천(突泉)에 이르러 샘물을 떠서 차를 끓여 마신 뒤 그 물맛에 반해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란 칭호를 내렸다.



중국에는 네 개의 신성한 강이 있으니 사독(四瀆)이라 불렀다. 강(江, 장강)·하(河, 황하)·회(淮, 회수)·제(濟, 제수)이다. 제수(濟水)는 허난(河南)성 지위안(濟源)에서 발원해 산둥성을 지나 발해만으로 흘러들어갔다. 청 함풍(咸豊) 6년(1855) 황하(黃河)가 하류의 둑이 터지면서 강줄기를 북쪽으로 크게 틀었다. 이로부터 황하는 제수와 합쳐졌다.



중화문명의 양대 아이콘인 황하와 태산(泰山)의 사이에 위치해 그 정기를 받아들인 지난시는 산둥성의 중심도시다. 멀리로는 신석기 시대 대문구(大汶口)문화와 검은 도자기(黑陶)를 특징으로 하는 용산(龍山)문화의 무대였다. 도시로서의 지난은 26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진시황(秦始皇)이 군현제(郡縣制)를 확립할 당시에는 제북군(濟北郡)에 속했다. 한(漢)초 제수의 남쪽에 제남군(濟南郡)을 설치하면서 지난이란 이름을 얻었다. 당시 제남군의 치소(治所)는 현재 지난시의 장추(章丘) 일대였다. 『삼국연의』의 영웅 조조(曹操)도 지난과 인연이 깊다. 그의 둘째 부인 변(卞)씨가 지난 출신이다. 조조는 지난에서 황건적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웠다. 이에 제남군의 승상에 임명되면서 훗날 패업의 기초를 쌓았다.



위진남북조 시기 지난은 전란의 중심지였다. 중원의 한족이 북방의 이민족에게 도살당하면서 남으로 대량 이주를 감행한 진(晉) 영가(永嘉, 307~312)년간에 제남군의 중심은 장추 일대에서 천불산(千佛山)이 위치한 리청(歷城)으로 옮겼다. 수당(隋唐)시대 지난은 불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강남에 못지 않게 경제적으로 흥성하던 지난은 북송(北宋)말 여진족이 남하해 지방정권을 세우면서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금(金)이 건국한 뒤 지난은 부(府)로 승격됐다. 곧 도시 북쪽에 소청하(小河)를 뚫어 바다와 교통로가 뚫리면서 소금 집산지로 발전했다. 원(元)대에는 천하의 문장가들이 지난에 모여들었다. 지난은 곧 문향(文鄕)으로 이름을 떨쳤다.



명(明)·청대 지난은 산둥성의 성도(省都)가 됐다. 1840년 아편전쟁부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지난은 독일군의 군화에 짓밟혔다. ‘천하의화권 흥청멸양(天下義和拳興淸滅洋)’의 구호를 내건 의화단 항쟁이 발발했다. 청이 무너지고 민국시대에 들어선 이후 1929년 지난시가 설립되면서 지금에 이른다. 1928년 5월3일에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지난사변’을 일으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던 아픔의 도시이기도 하다.



2600년 역사, 춘추시대 최고 번영 도시



지난(濟南)시의 대표적인 샘물인 표돌천(?突泉)과 정자. 청 건륭제가 물맛에 반해 ‘천하제일천’이란 칭호를 내렸다. [이미지차이나]


지난 일대는 중국 인문(人文) 유산의 보고인 제노(齊魯)문화의 요람이다. 제(齊)나라는 주(周) 무왕(武王)이 강태공(姜太公)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이후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등용하면서 춘추시대 첫 패권국이 됐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상(宰相)으로 불리는 강태공과 관중의 묘와 사당은 모두 지난시 동쪽 120㎞ 옆 제나라의 수도였던 린쯔(臨淄)에 조성돼 있다.



현재 산둥성의 인구는 9579만여 명(2010년 기준)으로 중국에서 광둥(廣東)에 이어 둘째로 많다. 고대 역사서 『국어(國語)』에 따르면 춘추오패의 첫 주자 환공의 치세에 이미 제나라의 인구는 250만 명이 넘었다. 당시 가장 큰 대국이었다. 태산의 웅장함과 평원의 광대함을 겸비한 린쯔는 혁명적인 재상의 기상이 숨어 있는 땅이다. 이곳에서 병법의 대가 손무(孫武)와 손빈(孫)이 활약했다. 현재 남아 있는 린쯔 제국고성(齊國古城)의 성곽은 둘레 21㎞로 당시 7만 호가 거주했다. 당대 최고로 번성한 도시였다. 번영의 기반은 관중이 닦았다.



관중의 성공 비결은 그의 정치 철학을 정리한 『관자(管子)』 ‘입정(立政)’편에서 엿볼 수 있다. “군주가 살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하나는 덕이 그 사람의 지위와 맞는지, 둘은 공이 녹봉과 맞는지, 셋은 능력이 그 자리에 맞는지 살피는 것이다(君之所審者三. 一曰德不當其位, 二曰功不當其祿, 三曰能不當其官).” 요즘식으로 바꾸면 능력인사, 공개인사, 업적주의다. 관중은 이 세 가지 인사 원칙에 따라 정치를 펼쳤고 성공했다. 관중은 전국을 9만 가구로 꾸린 다섯 개의 속(屬)으로 나누고 각각 대부에게 정치를 맡겼다. 농작물 수확이 적은 속은 우두머리에게 책임을 물었다. 단, 한 번은 너그러이 봐줬다. 세 번 계속될 때에만 처벌했다. 관중식 책임정치다.



제환공은 자신을 화살로 쏘아 죽이려 했던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한 지 6년 만에 패자가 됐다. 기원전 679년 지금의 산둥성 쥐안청(城)인 견() 땅에서 회맹(會盟)을 소집했다. 패권의 최전성기인 651년에 규구(葵丘)에서 회맹해 제를 경찰국가로 하는 국제질서를 확립했다.



남쪽 50㎞ 거리엔 공자의 고향 취푸



‘샘의 도시(泉城)’로 불리는 지난시 우룽탄(五龍譚) 공원에서 발견된 호랑이 얼굴을 한 잉어가 헤엄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에서 남쪽으로 50㎞ 정도 내려가면 오악의 으뜸[五嶽獨尊] 태산이 우뚝 솟아 있다. 70㎞ 정도 더 내려가면 만세사표(萬歲師表) 공자(孔子, BC 551~479)의 고국 노(魯)의 수도 취푸(曲阜)시다. 기원전 645년 관중이 세상을 뜨면서 제는 급격히 쇠락했다. 관중 사망 94년 후 공자가 취푸에서 태어났다.



공자는 학자다. ‘배우길 그치지 않아 관 뚜껑을 덮고서야 그쳤다(學而不已, 闔棺乃止)’고 할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敏而好學不恥下問)’. 중년에 접어들어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有敎無類)’고 주장하며 교육에 힘썼다. 나이 54세에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떠돌았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고, 위나라에서도 추방당하고, 송나라에서는 나무를 베어 넘겨 죽이려 했고, 진나라와 채나라에서는 포위를 당했다(丘再逐於魯, 削迹於衛, 伐樹於宋, 圍於陳蔡)’. 파란만장한 여정을 마치고 68세에 노나라에 돌아온 그는 『시(詩)』 『서(書)』 『예(禮)』 『역(易)』을 편찬하고, 『춘추(春秋)』를 지었다. ‘인간’ 공자는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공자는 죽은 뒤의 역사가 더욱 파란만장했다. 연작 『춘추전국이야기』(역사의 아침)의 작가 공원국은 “공맹의 도를 뒤집어서 왕조를 세우고, 일단 세우면 너나 할 것 없이 공맹을 외친다”고 중국의 역대 왕조를 비판한다. 공자와 왕권의 기이하고도 끈끈한 공존은 취푸에 있는 공묘(孔廟)에 세워진 역대 황제들의 수많은 비석에서 확인된다.



관중을 보는 공자의 시각은 이중적이다. 공자는 관중을 ‘그릇이 작다(器小)’고 하면서도 ‘그가 없었으면 오랑캐 땅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 뒤 ‘그는 착하다[如其仁]’고 말했다. 관중은 예(禮)를 모르는 야인(野人)이었지만 현실주의 정치가였다. 기나긴 유아독존의 황제시대 동안 중국의 정치가들은 이념적으로 관중을 버리고 공자를 취했다. 대신 뒤돌아서 『관자』를 읽었다. 지난시에서 동으로 가면 관중을, 남으로 가면 공자를 만날 수 있다. 그 옆에서 강태공과 맹자를 만나는 것은 덤이다. 맹자의 고향 추(鄒)는 취푸에서 30㎞가량 떨어진 지척이다.



인문의 향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천녀유혼’의 원작인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의 작가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의 고향이 지난시 동쪽으로 86㎞가량 떨어진 쯔촨(淄川)이다. 『수호전(水滸傳)』 108 영웅들의 산채(山寨, 산적들의 소굴, 짝퉁을 뜻하는 중국어 ‘산자이’와 같다) 양산박(梁山泊)은 지난시 남서쪽 130여㎞ 떨어진 곳에서 매우 ‘중국스러운’ 모양새로 오늘도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호탕·질박한 성격 … 유학의 근원지



지난 일대에 사는 이들은 어떤 기질의 소유자일까? ‘중국=자장면’을 떠올리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천성이 비슷한 중국인은 단연 산둥사람이다. 그들의 피에는 제나라와 노나라 문화의 DNA가 흐른다. 분서갱유라는 진시황의 문화혁명이 끝난 뒤 한나라 동중서(董仲舒)는 “백가를 배척하고 유학만을 존중한다(罷黜百家, 獨尊儒術)”라는 여덟 자 헌법을 제창했다. 이후 산둥은 유학의 뿌리가 됐다. 산동 사람들은 유학의 유(儒)자 옆에 붙은 ‘사람인 변()’ 그 자체이다. 그들의 성격은 호탕하고 질박하다. 두 군주를 섬길 줄 모르고 정직과 애국, 충성의 화신이다.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기개를 뜻하는 의기(義氣)가 충만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산둥 출신의 군인이 많다. 그들은 고난에 익숙하다. 츠쿠(吃苦, 고생하다), 나이라오(耐勞, 괴로움을 참다)라는 중국어는 산둥인 앞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2008년 중국중앙방송(CC-TV)이 1930년대 산둥인들의 동북 개척사를 그린 52부작 드라마 ‘촹관둥(闖關東·틈관동)’을 상영했다. 삭막한 만주 벌판을 개척한 산둥인들의 서사시였다. 인구압력에 시달리던 산둥인들의 일부는 그렇게 만주로, 한반도로 흘러 들어가 삶을 개척했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공자의 후예답게 교육열 또한 중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 또 있다.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不患寡 患不均)’는 공자의 말씀도 산둥 사람들이 신봉하는 금과옥조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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