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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권력은 시민에게서 나온다 … 로마제국 S.P.Q.R.의 의미, 김정은은 배웠을까

중앙일보 2011.12.27 00:00 종합 35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북한의 3대 세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김정은의 나이가 어린 데다 후계 준비가 짧았다는 데서 나오는 추론이다.



 호사가들의 말잔치 같은 얘기지만 그 이유를 살펴볼 순 있겠다. 1775년 여든두 살의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의향을 밝힌다. 양위(讓位) 의사를 내비쳤다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뒤 생각해낸 대안이었다. 양위란 임금이 생전에 후계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행위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 권력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기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정치기술인 것이다.



 신하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임금의 본심을 꿰뚫어봐야 하는 까닭이다. 임금이 진정 쉬고 싶어 한 말인데 반대하면 불충(不忠)이요, 임금이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인데 찬성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드디어 좌의정 홍인한이 아뢴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도 알 필요 없으며 조정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른바 삼불필지론(三不必知論)이다. 대리청정에 반대한다는 얘기였지만 땡! 잘못 짚었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공식 선포했으며 석 달도 못 돼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잘나갈 때 로마는 철저한 실력주의 사회였다. 공화정 시대에는 민회가 실력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이 정신은 제정 때까지 이어져 황제는 아들에게 경력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게 한 뒤에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 자식이 없으면 능력자를 양자로 입양해 정통성을 확보했다.



 영조의 뜻도 다르지 않았다. 세손이 대리청정으로 정사를 봄으로써 실력을 인정받게 하고 싶었다. 당쟁의 희생자였던 사도세자의 아들인 게 흠 잡힐까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로 왕통을 잇게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김정일 역시 뜻은 영조와 다르지 않았을 터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겠지만, 아들이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받길 바랐을 거다. 그래서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보다 두 살이나 많은 아들이 ‘경애하는 수령님’이 될 수 있기를 바랐을 거다.



 하지만 로마의 정신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황제 역시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받아 통치권을 위임받은 존재였다는 걸, 백성들의 경애가 거기서 나온다는 걸 말이다. 살아있다면 로마에 가보길 권할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아무 데서나 ‘S.P.Q.R.’이라 쓰인 표지를 볼 수 있으니 하는 얘기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Senatus Populus Que Romanus)’의 약자다. 그 의미를 새겼더라면 수양대군 얘기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훈범 문화 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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