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인슈타인 “정의·진리 추구한 모세, 인류의 참지도자”

중앙선데이 2011.12.25 01:29 250호 25면 지면보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56~120년께)는 엑소더스가 40년이 아니라 7일에 완료됐다고 주장했다.
유대교 전통에서 모세는 ‘우리의 스승 모세’라 불린다. 직·간접적으로 모세가 전한 가르침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엄청나다. 세계 인구 중 4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개념으로 묶이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을 믿고 있다. 유대교라는 일신교가 성립한 바탕 위에 기독교·이슬람이 싹틀 수 있었다. 유대교의 창시자는 모세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모세의 종교’이기도 하다. 비교종교학이나 역사학적으로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은 그 누구보다 모세의 그늘에서 탄생했다.
3대 일신교 모두가 숭상한 선지자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 모세


예수는 기독교와 이슬람에서 중시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예수는 ‘보통 유대인’이다. 모세는 3대 일신교 모두가 숭상한다. 기독교 복음사가들은 모세와 예수의 미션이 유관하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다. 예수 시대 상당수 사람들은 예수를 다윗·솔로몬의 왕국을 복원할 ‘제2의 다윗’으로 봤다. 예수는 ‘제2의 모세’이기도 했다. 광야에서 모세가 치켜든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살았다. 예수의 십자가는 구리뱀을 대체했다. 예수의 십자가에 담긴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게 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는 ‘제2의 아담’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이 모세와 같은 방향이라고 의식했다. 한편 코란은 모세를 502회나 언급한다. 이슬람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모세도 죽지 않고 바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본다.

모세는 종교사뿐만 아니라 세속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모세는 자유의 투사다. 그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탈출시켜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이끈 해방자(liberator)다. 약하고 못난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한다는 모티브는 해방신학에 강력한 근거를 부여한다.

해방보다는 구원을 중시하는 신앙에도 모세는 중요하다. 모세는 성경의 첫 다섯 권인 『모세 5경』(창세기·출애급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의 저자로 인정된다. 모세의 이름에는 구원의 뜻이 담겨 있다. ‘모세’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들’ ‘태어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모세에는 ‘물에서 꺼낸’ ‘물에서 구해낸’에서 나아가 ‘구하는’의 뜻도 있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모세는 그 자신 구원받았으며, 남을 구하는 사람이다.

모세는 세속사도 움직였다. 미국 혁명이 대표적인 예다. 식민 모국인 영국은 이집트, 미국은 제2의 이스라엘이었다. 모세는 미국 의회도서관, 하원 등 각종 국가·정부 건물과 상징물에 등장한다. 미합중국 국새(美合衆國國璽·The Great Seal of the United States)를 만들 때 벤저민 프랭클린은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든 모세와 홍해의 급류에 휩쓸리는 이집트 군대를 그려 넣자고 주장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광야에서 열을 지어 행진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선호했다.

모세가 앞장선 엑소더스(Exodus·出埃及) 사건이 세계사적 사건이 된 것은 엑소더스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십계명과 연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계명으로 신과 이스라엘은 계약을 맺었다. 신을 국가로 대체하면 민주 공동체의 구성 원리인 사회계약이 된다. 사회계약론의 발전에는 로크·루소·홉스 등 사회계약론자, 플라톤을 비롯한 그리스 사상가들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사상가·운동가들이 가세했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미스터리투성이
아인슈타인은 정치술수를 가르친 마키아벨리의 추종자들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를 정열적으로 추구한 모세가 인류의 참된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얄궂게도 마키아벨리는 모세를 높이 평가했다. 마키아벨리는 운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군주가 된 자들 중에서 최고는 모세, 키루스 2세(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로물루스(로마의 건국자)를 꼽았다.

모세는 언제 태어나 언제 돌아갔을까. 4세기에 활동한 역사가·주교인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모세의 활동 기간은 기원전 1592~1472년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계산에 따르면 기원전 1391~1271년이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세 개의 40년으로 나뉜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이주 이후 400년 동안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파라오는 이들이 이집트의 적들과 결탁할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파라오는 히브리인 남자 신생아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모세의 부모는 역청과 송진을 발라 만든 작은 파피루스 배에 그를 담아 물에 띄워 보낸다. 모세를 발견한 이집트 공주(일설에 따르면 시리아 공주)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세는 40년 동안 이집트 왕자로 살아간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인지 모세는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 노동감독관을 죽인다. 도망친 모세는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 요르단 남부에 있는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 산다. ‘연소하지 않는 불타는 나무’에서 신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출애급에 성공하고 인생의 마지막 40년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광야에서 보낸다.

근대에 들어와 모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됐다. 성경 외에는 모세에 대한 동시대 기록이 없다. 출애급이 수치스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일까. 이집트에는 모세나 엑소더스에 대한 기록이 없다. 모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초에나 나오기 시작한다.

모세가 과연 실존 인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모세의 삶과 엑소더스가 ‘성경에 나온 그대로다’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대해 ‘모세도 엑소더스도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모세도 엑소더스도 역사적 사실이지만 ‘과장됐다’는 입장이 그 중간에 있다.

모세가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진짜 시나이 산의 위치도 알 수 없다. 오늘날 관광 명소로 유명한 시나이 산의 위치는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지정한 것이다. 일단 위치를 정하자 순례지로 워낙 인기가 높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527년 시나이 산에 성카테리나 수도원을 창건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이 아니라 이집트인이라는 주장이 기원전 300년께 활동한 이집트 성직자 마네토를 비롯, 고대부터 제기됐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인기를 끈 ‘이집트인 모세 가설’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전개했다.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1939)는 일종의 ‘역사 소설’로 폄하되기도 한다. 책에서 프로이트는 모세가 일신교를 믿는 이집트인 사제이거나 귀족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신교를 대체하는 일신교 종교혁명이 이집트에선 실패했으나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는 폭약 전문가였다. 갈 길을 예고하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폭발로 만들었다. 폭발 실험을 하다가 얼굴을 다친 모세는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프로이트는 또한 모세가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슬람·모르몬교에선 승천설 믿어
‘성서는 신의 음성을 받아쓰기 한 게 아니다’는 사람들에게 성서는 문학적 허구다. 성서는 4~5개의 다른 작가·편집자 집단이 700~800년에 걸쳐 쓴 역사서·문학서다. 이들은 『모세 5경』만 해도 1만 가지 다른 판본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시각에 따르면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영화 ‘십계’(1956)에서 나오는 것처럼 홍해가 반으로 갈라지는 기적은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넌 것은 홍해(Red Sea)가 아니라 ‘갈대바다(Reed Sea)’다. 홍해의 기적은 오역이 나은 오해다. 반론도 제기됐다. 에게해에 있는 테라 섬의 화산 폭발(기원전 1350~1450년께)로 말미암아 홍해의 기적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테라 섬 화산 폭발은 아틀란티스 대륙 침몰의 원인으로도 지목된다.)

‘성서 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에서도 모세를 둘러싼 끝날 수 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초창기 성서 고고학자들은 ‘한 손에는 삽,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고 유적지로 떠났다. 점차 성서 고고학의 목적은 성경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배경을 탐구하기 위한 것으로 변했다. 고고학은 『모세5경』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고고학의 성과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관계가 마냥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세력과 현지에서 살던 사람들의 연합으로 이뤄졌다는 가설이 힘을 입게 됐다.

‘역사적 모세(historic Moses)’의 참모습을 알아내는 것은 ‘역사적 예수(historic Jesus)’를 찾아 내려는 작업 못지않게 어렵다. ‘역사적 누구 누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 ‘신화적 누구’도 ‘역사적 누구’가 되는 게 아닌가.

일부 고대 그리스인들조차 모세를 미화하고 우상화하려고 했다. 모세가 페니키아 알파벳을 만들었으며 호메로스·헤시오도스에게도 영향을 줬다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반면 성서의 저자들에겐 의도적 역사 조작을 회피하는 성향이 있었다. 다른 고대 문헌의 저자들과 달리 영웅의 우상화를 꺼렸다. 성서 저자들은 이스라엘 인물들의 인간적인 나약함이나 그들의 죄상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성서에 나오는 모세는 주저함이 지나쳐 종종 비겁한 모습이다. 아브라함·다윗과 마찬가지로 모세의 도덕적인 오점들도 기록됐다.

모세는 말을 더듬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모세가 어떻게 생겼는지 성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성서에 나오는 모세는 신에게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일한다. 그러나 모세는 신과 긴장 관계다. 그는 백성 편에 서기 위해 신과 논쟁을 벌인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약속에 땅을 입성하는 것을 못 보고 120세에 사망했다. 탈무드 전통에 따르면 120세가 되는 생일에 사망했다. 모세의 형으로 사제 역할을 맡은 아론이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모세가 죽었을 때는 사내들만 울었다. 『신명기』를 보면 신이 직접 모세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장한다. 이슬람과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모르몬교)에서는 모세는 죽지 않고 바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위대하고 특별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