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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정, 비밀조직 ‘연통제’로 조선총독부에 맞서다

중앙선데이 2011.12.25 01:23 250호 26면 지면보기
1930년대 함경북도 청진의 거리 풍경.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인 함북연통제가 적발돼 윤태선·김린서 등 47명이 함흥지법 청진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② 국내 행정망 만들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령 제1호가 연통제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1919년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해 7월 10일 공포한 국내 비밀 행정조직이었다. 임정은 전국을 13도 12부 215군으로 나누어 서울에는 13도 총감부를 설치하고 각 도에는 감독부(監督府), 각 부(府)와 군에는 총감부(總監府), 각 면에는 사감부(司監府)를 설치하기로 했다.
자료 부실 때문에 정확한 현황은 알 수 없지만 국경 부근인 함경도·평안도에서는 면 단위까지 연통제가 실시되었다. 연통제는 물론 비밀조직이었으나 1919년 9월 임정의 평안남도 특파원 유기준(劉基峻)이 평양 기성의원에서 체포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기준은 취조를 받던 도중 도주했지만 연통제 관련 서류들을 빼앗기면서 단서가 드러난 것이다.

연통제에 경악한 일제는 이를 뿌리 뽑기 위해 수사망을 총가동해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의 연통제 조직을 찾아냈다. 함북 회령과 경성(鏡城)에서 김린서(金麟瑞)와 박원혁(朴元赫) 등을 비롯해 47명이 기소된 사건이 함북 연통제 사건이다. 7~8개월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은 후인 1920년 8월 4일부터 재판에 부쳐졌는데, 동아일보(1920년 8월 22일자)는 ‘세인(世人)을 경해(驚駭:크게 놀람)케 한 연통제 공판’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온 세상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더욱 당국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던 신한민보 9월 23일자에도 거의 그대로 실렸다.

임정이 비밀리에 국내 행정조직망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기사는 “칠팔 삭 동안이나 철창 아래에서 신음한 까닭으로 얼굴에는 혈색이 하나도 없이 하얗게 세었고 그중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있는 것이 한층 더 사람의 비애를 자아낸다”고 전했다. 회령 출신의 68세 노인 강준규(姜俊奎)를 지칭한 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국내에 조직한 연통제는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육군성에서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 총리대신에게 보낸 ‘연통제 조직의 독립기관 검거의 건’에는 함경북도 총감독이 강준규이고, 부감독이 김린서, 서기 박원혁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동아일보와 ‘판결 대정(大正) 9년(1920) 형공 제1581호’ 등에 따르면 47명 중 중형인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윤태선(尹台善)은 서울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에서 강대호(姜大鎬:개성), 박상목(朴相穆:평안도), 송범조(宋範朝:경상도), 강택진, 박시묵 등과 만나 서울에 (연통제) 13도 총감부를 설치하고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13도 총감부 산하에 총무·노동·재무·경무·편집·교통·교섭의 7부를 설치하고 곽병도 등을 특파원으로 파견해 자금도 모집했다.

윤태선은 함북연통제 사건 공판에서 ‘13도 총감부는 상해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와 대립하는 관청인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명령과 지휘를 받는 하급관청’이라고 답해서 상해 임정 산하 조직이란 사실을 밝히고 있다. 1919년 8월 4일 함흥지법 청진지청(淸津支廳)에서 열린 공판은 이 당시 독립운동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각지에서 400여 명의 방청인이 몰렸지만 일제는 법정이 협소하다면서 이들을 막고 피고들만 입장시켰다. 재판장 이시바시(石橋), 배석판사 아사하라(淺原), 검사 진토(新藤)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김린서는 임정의 경원선연변(京元線沿邊:서울~원산) 특파원 명제세(明濟世)를 통해 임정의 지령문인 목록견서(目錄見書)를 받았다. 목록견서는 ‘①군자금 모집 ②군사 경험 있는 자를 조사 통지할 일 ③독립 시위운동을 행할 일 ④각 관청과 군대에 있는 조선인의 상황을 조사 통지할 일 ⑤병기·탄약에 관한 상황을 통지할 일 ⑥구국금(救國金)을 모집할 일 ⑦시위운동으로 피해 받은 상황을 조사 보고할 일’ 등으로 임정이 연통제를 통해 실시하려던 사업이 열거되어 있다. 임정은 즉각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는 쪽과 외교독립론 쪽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 지령은 독립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함경도 경성 총감 이상호(李相鎬)의 진술에 따르면 경성은 오촌·주을온·주북·나남·용성·어랑면 등 면 단위까지 조직망이 갖추어져 있었다. 일제는 공무원들까지 연통제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는데, 함북 연통제 사건의 특징은 모든 피고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린서는 “이번 사건은 조선 독립을 도모한 것”이라면서 서류의 적(敵)은 일본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상호는 “걸핏하면 우리 조선인이 안녕질서를 문란케 한다고 하지만 실상 일본인이 우리의 안녕질서를 문란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안녕질서를 위하여 독립하려 한다”고 답했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고문이 행해졌으며 검찰도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도 폭로되었다. 군(郡)서기였던 이운혁(李雲赫)은 “나남경찰서에서 몹시 얻어맞아 허위자백을 했다. … 그날 다른 사람이 몹시 맞아 죽게 된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고, 김동식(金東湜)은 “검사가 나남경찰서에서 경찰관과 동석해 심문했다”고 검찰이 경찰의 고문을 묵인했다고 진술했다. 박원혁은 상해 임시정부의 상황을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보고 알았다”고 답해서 연통제를 통해 임정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이 배포되었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다.
간도에서 무장단체인 결사단지대(決死斷指隊)를 조직했던 이규철(李揆哲)은 재판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였다. 재판장 이시바시가 “간도(間島)에서 독립 운동하던 사실을 진술하라”고 말하자 “간도영사관에서 조사한 일이니 이 재판소에서 물을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재차 묻자 “지난 일이라 다 잊었다”고 거부했고, 통역이 “답하라”고 나서자 “통역이면 통역이나 하지 왜 나서는가?”라면서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이 기세에 위축된 통역이 “나는 조선사람으로서 친일파가 되어 통역을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체면을 차려서라도 잘 대답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말하자 이규철은 “체면을 차리다니? 내가 이곳에 대접받으러 온 줄 아는가?”라고 꾸짖었다. 재판장이 “피고를 퇴정시키고 결석 상태에서 판결하겠다”고 위협하자 “퇴정을 명하려거든 하라”고 맞섰다.

결사단지대는 다른 자료에서 한인결사동맹(韓人決死隊同盟)으로 나오는데, 재판장 이시바시가 “잘랐다는 손가락을 보이라”고 요구하자 이규철은 주먹을 단단히 쥐면서 “정 보겠으면 내려와서 보라”고 답했다. 그러자 간수와 순사들이 이규철 곁으로 몰려들어 ‘살기가 법정 안에 가득 찼다’고 기사는 전한다. “끊은 손가락을 항상 보면서 결심을 계속하자는 것”이라고 단지(斷指)의 이유를 말한 이규철은 자신을 “강도(强盜:일본)에게 붙잡혀 온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8월 7일 검사 진토는 “본 사건은 작년의 만세소요와 그 취지가 달라서 상해 가정부와 연락하고 조직적으로 단체를 만들어서 성대하게 조선독립을 운동해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 이렇게 국가의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해서 국가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자는 속히 박멸치 않을 수 없다”면서 징역 6년까지 구형했다.

6년을 구형받은 윤태선은 “강탈한 나라를 도로 찾고자 함이 무슨 죄냐”고 항의했고, 김린서는 “총독의 행정에 반감을 품고 이번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번 사건은 총독의 죄”라면서 검사를 꾸짖었다. 5년형을 받은 김동식은 “우리는 적국의 포로가 된 몸이니 5년이 아니라 50년이라도 복역하겠다”고 맞섰고, 최종일(崔宗一)이 “당신네는 우리를 피고, 피고 하는데, 제 것을 되찾고자 하는 우리가 원고인가 남의 것을 빼앗은 일본이 원고인가?… 일본인은 재판장이 될 수가 없다”고 따지자 당황한 이시바시는 “이런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제지했다. 그러나 최종일은 “일본 형법이 사내(寺內:데라우치)와 당국자는 처형하지 않느냐?”고 절규했다.

원고와 피고가 뒤바뀐 재판이었다. “삼천리 강토가 다 유치장이요 감옥인데 나간들 무슨 자유와 행복이 있겠느냐?”라고 말하는 사람, “앞집에서 뒷집 것을 탈취해서 앞집 사람이 송사를 한다면 재판장은 어떻게 처결하겠는가?”라고 따져묻는 사람도 있었다. 기사는 “재판장과 간수, 순사가 제지해도 듣지 않아서 법정은 소연하고 일대 수라장을 이루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시바시는 “더 들을 필요가 없다”면서 폐정을 선언하고 도망치듯이 뛰어 들어가야 했다.

함북 연통제 사건뿐만 아니라 평북 중화군(中和郡) 출신의 목사 강시봉(姜時鳳) 등 8명이 징역 5년에서 2년까지를 선고받은 평북 연통제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평북 영변(寧邊) 출신의 선규환(宣奎煥)은 연통제 사건으로 1927년까지 무려 8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일제는 연통제를 뿌리뽑지 않으면 국내 통치기반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정부’라는 이름을 내건 조직이 있다는 자체가 일제로서는 큰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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