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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컬러, 독특한 줄무늬로 입지 다진 ‘니트의 여왕’

중앙선데이 2011.12.25 01:19 250호 28면 지면보기
프랑스는 명품 대국으로 전 세계 명품시장 품목의 50%를 공급한다. 그런데 막상 프랑스어엔 우리말 명품에 꼭 들어맞는 단어가 없다. 그저 사치품 정도로 부른다. 일본·중국·한국·태국 등 아시아 국가는 프랑스 명품의 큰 시장이다. 특히 일본 여성 고객은 1970년대 보잘것없던 가방회사 루이뷔통을 세계 1위의 명품 그룹으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파격의 패션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

프랑스가 명품에 유독 강점을 갖는 이유가 있다. 명품은 과거 왕실이나 귀족층에 공급되던 복식과 장신구가 대중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왕정과 귀족 전통이 강한 프랑스가 자연 명품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명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앞서 가는 미적 감각과 창의력, 철저한 장인 전통 그리고 고도의 심리적 마케팅이 합쳐져야 한다. 여기에다 최근엔 브랜드 가치의 극대화도 필수적이다. 창의력을 중시하는 유대인들 중엔 세계적 디자이너가 많다.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 도나 카란, 케네스 콜,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등을 들 수 있다. 프랑스 여성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사진)은 디자이너의 전설인 코코 샤넬이나 잔 랑뱅을 잇는 프랑스 현대 패션계의 대모다.

카트린 드뇌브, 오드리 헵번이 단골
리키엘은 193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어머니는 루마니아 유대인이다. 모계가 유대인이면 자식은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어린 나이인 20세에 결혼한 리키엘은 남편과 함께 조그만 의류 부티크 로라를 경영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임신복을 사려고 파리시내를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스웨터를 짜서 입었다. 이후 리키엘은 임신부용 직물을 주로 만들어 판매했다. 그녀는 옷가게 현장에서 눈으로 패션을 배운 것이다.

남편과 이혼한 뒤 그녀는 68년 파리 6구 학생가 끝자락에 위치한 생제르맹데프레에 자신의 이름을 딴 부티크를 차렸다. 당시는 샤넬·크리스찬디올 등이 내놓은 고가의 우아하고 절제된 중년여성용 정장이 패션의 주류였다. 리키엘은 전통 패션과 달리 모든 연령층의 여성이 입을 수 있는 귀엽고 실용적인 패션도 명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가 먼저 착안한 게 니트웨어였다. 당시 프랑스 패션계는 소재가 거칠고 또 여러 겹의 직물을 교차해 짜는 공정이 수반되는 니트를 기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통념을 깨고 강렬한 스트라이프나 무지개, 물방울 등의 패턴을 니트에 가미해 선풍을 일으켰다. 다양하고 과감한 색상과 함께 특이한 줄무늬의 리키엘 직물은 명품 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6000여 점의 니트 패션을 선보이면서 ‘니트의 여왕’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평상복에 불과했던 니트를 파티 드레스 등 명품으로 둔갑시켰다. 그녀의 니트 의류는 당대 프랑스 인기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미국 명배우 오드리 헵번이 애용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전통적 명품패션의 소재가 아닌 니트를 실용성 있고 착용감 좋은 명품으로 만든다는 집념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리키엘의 파격 발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유아복과 아동복에도 관심을 갖는다. 주변 모두 이 사업 구상에 반대했다. 아동복은 결코 명품이 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어린이 옷은 6개월이 지나면 폐품이 된다. 아이들의 성장이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옷을 험하게 입는다. 또한 1가구 1자녀형 프랑스 가정엔 물려 입힐 동생도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변의 조언에 개의치 않고 아동복의 명품화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리키엘은 디자이너인 딸 나탈리와 함께 오랜 작업 끝에 83년 귀엽고 우아한 유아·아동복 수십 종을 출시한다. 모든 부모는 생활 수준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자기 자식만은 예쁜 옷을 입히고 싶어한다는 심리를 파고들었다. 리키엘의 아동복은 대성공을 거뒀다. 90년대 초엔 남성복도 만든다. 20~30대 도시 청년층을 겨냥해 팬시한 캐주얼 남성복을 선보였다. 외국 진출을 꺼려 프랑스 국내에만 머물던 소니아 리키엘 매장은 96년 이후 미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일본·한국 등 36개국으로 확장됐다.

80세 넘어서도 새벽마다 스케치 작업
과감한 색상과 패턴의 패션 스타일과 달리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의 리키엘은 대중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다. 언론 인터뷰는 사양하고 오로지 자신의 패션쇼가 있을 때만 나타나 관객에게 인사한다. 대신 그녀는 그녀의 글을 통해 대중과 교감한다. 리키엘은 79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일곱 권의 수필집을 출간했다. 그중 여류 문인 레진 데포르주와 주고받은 서신을 모아 2005년 책으로 엮은 카사노바는 여자였다는 베스트셀러였다.

전문 패션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호기심과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가정주부 리키엘은 우연한 기회에 패션에 착안해 오늘날 세계적 디자이너가 됐다. 그리고 항상 통념을 깨는 발상으로 프랑스 패션계를 선도했다. 80세를 넘긴 그녀는 지금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생각나는 대로 스케치를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딸 나탈리와 함께 새로운 디자인을 구상한다. 세간의 호평이나 비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는 일념에 따른 장인정신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최근 몇몇 한국 디자이너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세계 수준의 장인은 나오지 않고 있다. 창의력의 원천인 호기심과 상상력을 무시하는 우리 교육 전통에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바로 이것이 창의력을 중시하는 유대인과 우리가 극명하게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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