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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한 예첸위, 세로 1m 가로 33m 화폭에 푸춘강 담다

중앙선데이 2011.12.25 01:17 250호 29면 지면보기
문혁이 끝난 후 감옥에서 나온 예첸위는 1년에 두 번씩 고향 퉁루(桐廬)의 푸춘강을 찾았다. 1993년 가을, 한때 부인이었던 무용가 따이아이롄(오른쪽)과 딸 밍밍을 푸춘강으로 초청한 예첸위.[김명호 제공]
몽골족이 북방에 원(元) 제국을 건국하기 2년 전인 1269년, 아직은 남송(南宋) 치하였던 장수(江蘇)성 창수(常熟)의 육(陸)씨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 부모는 양육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대로 내려오는 빈농이었다. 저장(浙江)성 용자(永嘉)에 황락(黃樂)이라는 노인이 양자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떠났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9>

황공망자구의(黃公望子久矣), “황공이 아들을 바란 지 오래”라는 말이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던 황락은 “이 애는 생부보다 나를 더 닮았다”며 좋아했다. 부자의 연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황공망(黃公望), 자(字)를 자구(子久)라고 지어줬다. 책 읽고 붓글씨 쓰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었던 소년 황공망은 현시(懸試) 신동과(神童科)에 합격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북방을 지배하던 몽골족은 황공망이 10살 되던 해에 남송마저 멸망시키고 과거제도를 없애 버렸다. 문인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행세깨나 하던 양자강 이남의 문인들은 거지나 창녀와 비슷한 신세로 전락했다.

예첸위의 제자 저우스충(周思聰·주사총·오른쪽)은 중앙 미술학원이 배출한 신중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였다. 1990년대 초 예첸위가 화랑의 농간에 말려들지 말라는 바람에 홍콩의 대형 전시회를 취소했다.
환로(宦路)가 막힌 청년 황공망은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의 관청에서 세금 징수와 전답 측량 일을 주로 했다. 말단이었지만 여기저기 다닐 기회는 많았다. 덕분에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로 위 상관이 탐관(貪官)이었다. 원나라가 과거제도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응시자 부모에게 뇌물을 받아먹었다. 돈 심부름한 죄로 황공망도 4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나이 50이 다 돼서 출옥한 황공망은 낮에는 시장에 나가 무를 팔고 해가 지면 등잔 밑에서 그림을 그렸다.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그림은 어릴 때 배운 글씨와 별 차이가 없었다. 글씨가 그림이고 그림이 곧 글씨였다.
80세 때부터 고향 푸춘(富春) 강변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화선지에 옮기기 시작한 황공망은 7년 만에 중국 회화 사상 10대 명작의 하나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완성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가로 636.9㎝, 세로 33㎝짜리 대작이었다.
황공망 사망 600년 후, 홍색 물결이 중국 천지를 뒤덮었다. 중앙미술학원 국화과 주임 예첸위(葉淺予·엽천여)도 홍위병들에게 끌려갔다. 온갖 죄가 쏟아져 나왔다. “미국과 자산 계급을 숭상하는 투기꾼, 진보와는 일정한 거리를 뒀던 자유주의자, 수업시간마다 미국 문화를 찬양한 미 제국주의의 문화 침략 도구, 정규 미술학교 출신도 아니고 만화 덕분에 명성을 얻은 주제에 정치적인 입장을 한번도 밝힌 적이 없다. 중국 전통화의 기법을 교육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 창작과는 거리가 멀다. 당의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정치운동과 사상 개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툭하면 사표를 던지며 가르치는 것은 공적인 일이고 창작은 사사로운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마치 가장이라도 된 것처럼 우리를 지도했다.”
예첸위는 7년간 농장과 감옥을 전전했다. 고향 산천이 그리울 때마다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는 황공망의 ‘부춘산거도’와 청대 시인 왕청참(王淸參)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이미 황공망이 세상에 없으니, 과연 누가 푸춘강을 그릴 수 있을까.”
1975년 출옥한 예첸위는 푸춘강을 찾았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4년에 걸쳐 황공망 이후 시인묵객들이 1000여 편의 시와 산문을 남긴 푸춘강변 33㎞의 자연과 생활상을 담은 세로 1m, 가로 33m에 달하는 거작 ‘부춘산거신도(富春山居新圖)’를 완성했다.
예첸위는 말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 쉬페이훙(徐悲鴻·서비홍), 장다첸(張大千·장대천) 등 대가들의 작품 100여 점과 함께 ‘부춘산거신도’를 고향에 기증했다. 이유가 분명했다. “예술은 사회와 인민의 것이다. 나를 키워준 고향에 보답할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미술 작품을 놓고 불량한 상황이 발생할 날이 머지 않았다. 경고가 필요하다.”
딸 예밍밍(葉明明·엽명명)에 의하면 예첸위는 민간 공예예술이 없어질지 모른다며 학교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계산이 워낙 주먹구구식이라 거의 파산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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