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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지구촌 사고를 돌아보며

중앙선데이 2011.12.25 01:13 250호 30면 지면보기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69)이 2001년 친구인 미국 물리학자와 내기를 했다. 일명 ‘신(神)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Higgs) 입자의 존재 여부를 걸고 한 내기였다. 호킹은 힉스 입자가 없다는 쪽에 100달러를 걸었다. 때마침 그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힉스 입자를 찾는 실험을 했다. 대형 전자-양전자 입자가속기(LEP)를 돌렸다. 하지만 힉스 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호킹 박사가 내기에서 이긴 쪽이 됐다. 그러나 승부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박경덕 칼럼

CERN은 다시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LEP보다 훨씬 강력한 세계 최대 규모의 강입자가속기(LHC) 제작에 들어갔다. 무려 10조원을 투입한 끝에 입자 간 상호작용까지 고려하는 차세대 가속기를 2008년 완공했다. 10조원짜리 LHC를 돌린 지 3년 만에 최근 정체불명의 신호(signal)가 포착됐다. 연구소 측은 “실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이 신호가 힉스일 확률은 98~99%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 신호는 집채만 한 초고성능 디지털카메라가 잡았다. 물론 아직도 힉스 발견을 선언하기에는 1~2% 부족하다. 하지만 이제는 호킹이 100달러를 잃을 확률이 훨씬 높아졌다. 천재 물리학자로선 돈으로 환산 못 할 자존심의 상처를 받게 됐다. 천재도 틀릴 수 있다.

올해 지구촌 최악의 사고로 꼽히는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도 인간이 자연과의 ‘내기’에 지면서 비롯된 참혹한 재앙이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일본은 자신의 기술을 믿었다. 그리고 일본이 만든 원자로는 100% 안전할 것이라는 ‘안전 신화(神話)’에 베팅했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에서 비롯된 최악의 쓰나미에 일본의 안전 신화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거대한 파도에 전기가 끊어지고 비상발전기마저 물에 잠기면서 후쿠시마 원전은 냉각시스템이 마비됐다. 원자로는 순식간에 펄펄 끓어올랐다. 2800도를 훌쩍 넘기면서 우라늄 연료봉이 녹아내렸다. 방사능이 땅과 하늘로 퍼져나왔다. 진작에 바닷물이라도 퍼부었다면 최악의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자로를 버릴 수 없다는 욕심과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는 안일함이 사태를 키웠다. 결국 사고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일본 정부는 지난 16일 사고가 난 지 9개월 만에 ‘원전 사고가 수습됐다’고 선언했다. 과연 수습된 것일까. 최근 조사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앞바다 수심 5000m 심해에서도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다. 일본 당국은 이런 피해를 포함해 후쿠시마 사고 복구액이 향후 10년간 총 23조 엔(약 330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을 내놨다. 한 번의 내기에 진 대가 치고는 너무나도 큰 금액이다. 우리 인간이 조금만 더 겸허하게 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9월 15일 국내에서 발생한 순환 정전 사태도 우리에게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동안 우리의 삶은 전기에 관한 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선지 한국 사회는 아무리 전기를 많이 써도 괜찮을 거라는 데 ‘베팅’했다. 정부도 기업도 가정도 그랬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선 추우면 전기 히터를, 더우면 에어컨을 펑펑 틀었다. 절전 호소는 우리의 무감각한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전력 사정이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몰렸다. 사무실에서는 일손을 놓고, 엘리베이터가 멈춘 고층 건물에서는 사람들이 갇혔다. 수돗물이 끊겼고 현금계산기가 멈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 또한 내기에 진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까지 가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뒤늦은 반성이 없다면 다음번에 치를 대가는 훨씬 더 클 것이다.

기묘년 한 해가 또 저문다.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도전했고 많은 성취를 이뤄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문하고 싶다. 올해 인류가 맞닥뜨린 사고를 돌이켜보면서 다시 겸손해지자. 기술 신화(神話), 안전 신화란 없다. 이런 표현들은 우리가 늘 지향하는 목표일 뿐인데 어느 순간 교만함에 눈이 멀어 성취물로 착각되고 있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일 뿐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다.

2000여 년 전 오늘, 유대 땅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온 아기 예수는 자신의 탄생 장소로 낮고도 천한 말구유를 택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 낮은 곳으로 임한 아기 예수의 겸손을 다시 한번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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