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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공작’ 南 3000명, 北 250명 숙청된 98년이 분수령

중앙선데이 2011.12.25 00:34 250호 7면 지면보기
국가정보대학원에서 특강을 마친 국가정보원 신입 요원들이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원훈(院訓)이 걸린 복도 계단을 오르고 있다. [중앙포토]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 고위 간부를 지낸 A씨는 본지 기자와 만나 “국정원에 가 보니 대공 분야에는 쓸 사람이 거의 없어 깜짝 놀랐다”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몇 년 전 일이지만 최근 김정일 사망을 까맣게 몰랐던 요즘 ‘국정원 무능론’의 역사가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최고의 정보 기관은 언제부터 이런 지경이 된걸까.

김정일 사망과 한반도 대북 휴민트 붕괴, 그 내막

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직 간부와 탈북자의 말을 종합하면 1998년은 남과 북에서 ‘북한 공작’을 둘러싼 대형 사태가 벌어진 분수령이었다. 남한이 먼저였다. 그해 3월 말 당시 안기부 대북공작국 소속 간부 A·B씨는 ‘재택근무’ 명령을 받았다. 4월 1일부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휴민트(인적 정보)를 맡은 대북 공작국과 대공 수사국이 조직 개편으로 없어졌다는 게 명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한 달 조금 지난 때였다. 새 대통령은 안기부에 대대적 물갈이 폭풍을 일으켰고 북한 파트도 휩쓸렸다.

국정원 강제퇴직자 모임인 ‘국정원을 사랑하는 모임(국사모)’의 송영인 대표는 당시 상황을 “4월 1일은 국정원 581명 직원들이 당한 날”이라고 표현한다. 중앙정보부 때부터 29년6개월째 근무해왔고 이때는 제주도 부지부장이었던 그에게 새 지부장은 3월 31일 ‘면직 및 재택근무’를 통보했다. 사유는 ‘한나라당 서청원 사무총장과의 친분’이었다. 그는 1일 내곡동으로 항의하러 달려갔지만 총을 들이대는 방호요원에게 막혔다. ‘국내 정보·정치 파트의 직원과 북풍 사건 개입자들이 다 잘렸다’ ‘경상도 70%가 쫓겨났다’ ‘북한국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말들이 난무했다. 이즈음 파견 근무를 마치고 검찰로 복귀한 권영세 국회 정보위원장(한나라당)은 “당시 살생부가 돌았다”고 기억했다.

송 지부장은 같은 처지의 간부들과 ‘버티자’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를 포함한 2급 이상 간부 33명은 퇴직 조치됐다. 거기엔 A씨 등 북한 공작국 소속 간부, 대공 수사국 간부, 보안 과장 등이 들어 있었다. 이 가운데 21명이 99년 3월 30일 면직 취소 소송을 냈다. 소송 과정에서 인사 명령부 같은 자료가 취합되면서 물갈이 광풍의 면모가 드러났다.

98년 4월 1일의 ‘1차 쇄신’의 대상은 부이사관급 140명을 포함해 서기관급 581명이었다. 동시에 안기부 밖에선 대공 경찰 2500명, 기무사 요원 600여 명, 공안검사 40여 명이 해직됐다. 8개월 뒤 12월의 ‘2차 쇄신’ 내용은 300명의 추가 명퇴였다. 대북 공작국과 대공 수사국이 없어졌지만 면직되진 않아 ‘일 없이 남은 직원’ 들이 대거 나갔다. 8개월 사이 900여 명 안기부 직원이 나가면서 수백 명 북한 담당 인력도 함께 사라졌다. 당시 안기부 내 북한 분석관이었던 P씨는 “이사관급 이상 간부 수백 명이 당시 쫓겨나는 것을 봤다”고 했다. 99년 1월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쫓겨난 자리를 500명 새 직원이 채웠다. 모두 이종찬 원장-이강래 기획조정실장 때의 일이다. (※21명은
2003년 9월 12일 면직 무효 소송에서 승소했다. 송 대표는 “대북 담당들은 대외 접촉을 꺼린다”고 했다.)
이처럼 안기부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98년 10월, 북한에서도 일이 벌어졌다. 2001년 탈북했던 김유송(53)씨의 말이다. 당시 상좌로 총참모부 산하 함경도 무역회사 책임자였던 그는 이때 많은 장성들이 보위부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 친했던 교도훈련 지도총국장 임태영 상장(우리의 중장), 총참모부 2전투 훈련국장 우명훈 중장, 64저격여단 이상일 소장 등이 다 잡혔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안피득 총참모부 부참모장과 안산관에서 만났다. 군사건설 국장 출신 안 부참모장은 97년 금강산 공사를 완공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장성이었다. 안 부참모장은 “자고 나면 옆집 장성이 없어져 불안하다”고 했다. 그는 인민무력부 장성들 사택에서 살고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다. 후에 그도 체포됐다.

김씨는 보위사령부 함북 책임지도원 김선우 상장, 김상욱 고려호텔 책임지도원 등 여러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다. 모두 “남한 정권이 북한 사람을 고용했던 자료를 북조선에 넘겨줘서 잡은 것”이라고 했다. 김씨도 99년 9월 13일 ‘정부 전복 음모’로 체포돼 9일간 감옥 쇠창살에 매달려 고문을 받았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15년 형을 받았다가 ‘힘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나왔고 이어 탈북했다. 사업차 충남 홍성에 있는 그를 23일 찾아갔다.

-당시 사태의 원인은 날조 아닌가.
“아니다. 그들이 박정희 대통령 때 ‘김일성에게 충성해서 인민군의 최고 자리까지 올라가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분명히 들었다.”

-사람 수를 어떻게 알았나.
“감옥에서 들었다. 남에서 전향시켜 북으로 보낸 사람, 북에서 직접 포섭한 사람이 50명 정도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일 것이다. 모두 장군 100여 명, 당 간부 150명 이상이 체포되고 일부는 사형됐다.”

이 두 사태의 관계를 단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권영세 국회 정보위원장이 이 두 사건의 관련성은 알 수 없으나 이와 관계없이 과거 남쪽에서 북한 내 첩보망을 일부러 공개시켰었다고 국정원 일각에서 주장한다고 말한 점은 주목된다.

이종찬이 물러나고 천용택 원장이 들어온 뒤에도 ‘인적 쇄신’은 계속됐다. 계급 정년을 단축시켜 ‘고참’을 정리했다.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였던 김모씨는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이 되는 기간을 7년에서 5~6년으로 줄였다”고 했다. 이 같은 신구 인력의 대거 교체가 대북 정보 수집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만난 사람 모두가 “위축됐다”고 말한다.

6·15 남북 정상회담을 두 달 앞둔 2000년 4월, 군 정보기관의 실무 고위자 유모씨에게 국정원 기조실 데스크의 전화가 왔다. “대북 공작을 완화하고 템포를 늦추라”는 것이었다. 이씨는 “그런 일을 전화로 접수 못한다. 문서로 달라”고 했다. 소용없었다. 예산이 뭉텅 잘려나갔다. 그는 “2006년 노무현 정부 때까지 계속 20% 정도씩 줄였다. 김만복 위원장 때는 예산이 거의 반토막 났다. 내가 다루던 100억원 규모의 휴민트 예산도 거의 반토막 났다”고 말했다. 예산이 주니 인력도 줄었다. 강제 퇴직은 안 시켰지만 남는 팀원을 야전으로 보내면 적응 못하고 결국 퇴직했다. 그런 상황은 정보 활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유씨는 “활동 내용은 법에 공개 금지돼 있어 말 못하지만 활동이 둔해졌고 정보 소스 개발이 안 되고 정보의 질이 떨어졌다”고 했다.

국정원이나 군 정보당국의 정보 수집과 공작은 탈북자, 북한 국적 중국인(조교), 조선족, 러시아 동포, 조총련 등을 거쳐 북한 내부와 연결된다. 단계가 복잡해질수록 돈이 더 든다. 휴민트 활동비 삭감은 우선 정보 당국의 활동을 줄이고 이 돈에 의지하던 휴민트 사슬에 타격을 준다. 유씨는 “돈이 아니면 사람을 부릴 수 없어 휴민트가 척박해지는 현실에서 예산이 줄어드니 일이 더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을 했던 탈북자들이 다른 돈에 흔들리게 됐다. 이중 첩자로도 돌아섰다. 그래서 2005년에 국정원에서 ‘탈북자 사용 자제’ 지시가 내려왔다. 탈북자 역할이 컸던 북한 내부 첩보망이 크게 위축됐다.

여기에 일본도 방해가 됐다. 유씨는 “일본이 한국보다 10배쯤 더 돈을 쓰면서 동영상이나 자료, 정보를 가져간다”며 “돈이 적은 우리는 정이나 의리로 정보원을 대하는데 아직은 다행히 통한다”고 했다. 그러나 탈북자 박모씨의 말은 다르다. “한국 정보 당국은 너무 짜다. 일본은 적어도 세 배 이상을 준다. 한국이 자료에 100만원을 준다면 최하 300만~500만원을 준다. 영상은 훨씬 더 준다”며 “그런 게 쌓이면 김정일 사망 같은 대형 정보가 일본으로 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정보 사업이 상업화되면서 공작이나 침투 등을 통해 굵직한 정보를 가져오는 ‘원조 휴민트 사업’이 위축되는 현상도 생긴다. 한 직원은 “조금 위험하다 싶거나 남북 관계를 긴장시키는 대북 공작은 하려 들지 않고 몸을 사린다”고 지적한다. 결국 모든 상황들이 평소 정보의 질을 떨어뜨리고 초특급 정보 수집도 어렵게 만드는 방향으로 향한다.

국정원 고위직에 있던 외교부 출신 고위 인사는 “첫 브리핑 때 내가 아는 북한 인사를 엉뚱하게 설명하더라”고 했다. 또 다른 전 국정원 고위 인사도 “사람들은 국정원이 첩보 영화에서처럼 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알고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며 “그러니 그런 기대를 갖고 임명된 새 원장이 브리핑을 받을 때 알려진 것보다 조금 진전돼 있을 뿐인 것을 보고 다 놀라게 된다”고 했다. 그는 “통신·감청을 제외하면 휴민트에 의존하는 정보는 신문사보다 각별히 빠를 것도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권영세 국회 정보위원장도 “종합 분석력을 빼면 국정원의 정보 수준이 시민사회보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현실을 이명박 정부가 개선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다. 국사모 송영인 대표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 초기 국정원 부흥의 기대가 있었다. 송씨는 “2008년 대통령 특명에 따라 김성호 원장이 국정원 과거사 조사에 나서 연인원 3000명이 6개월간 동원돼 1만5000쪽짜리 보고서를 냈다. 그런데 김 원장은 퇴직하기 전 양지회(퇴직 국정원 간부 모임)에서 ‘보고서가 알려지면 안 된다. 여러 사람이 다친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후 국정원은 부흥에서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이다. 최근 국정원 간부들을 만났던 전직 간부는 “이 정부 들어와 대북 업무 조직을 재편하고 경쟁 구도도 만들었지만 ‘몇몇이 인사를 휘두른다’는 불만이 팽배해 있다”며 “많은 이가 ‘사고 안 치고 복지부동하며 사는 게 좋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다른 고위 간부도 “국정원 내 5인방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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