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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시나요 그때 그 ‘스위스 할머니’를

중앙일보 2011.12.22 04:10 Week& 1면 지면보기
1985년 한국에 정착한 뒤 20여년 동안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아온 스위스 출신의 마가렛 닝게토 할머니가 전북 군산의 집에서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활짝 웃고 있다. 위의 작은 사진들은 왼쪽부터 85년 전남 광주 영진육아원 근무 시절, 95년 경기도 용인보육원생들과의 나들이, 2002년 12월 31일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과 함께 제야의 종을 치던 모습(오른쪽 끝, 서울시 제공)이다. [군산=최명헌 기자]

“사람들 정에 이끌려 온 한국, 준 것보다 받은 게 더 많아요”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이 저물던 날, 1953년부터 시작된 제야의 종 타종행사에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이 참가했다. 마가렛 닝게토(현재 65세). 스위스 출신 간호사였다. 은빛 머리색 때문에 ‘스위스 할머니’라고 불리며 화제가 됐던 그는 당시 17년간 한국에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시민대표로서 보신각에 섰다. 2011년 제야의 종 타종행사에 참여할 시민대표 추천이 한창인 요즘, 9년 전 종을 울렸던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전북 군산 대야면을 찾은 지난 14일, 멀리서 오는 손님을 맞으러 큰 길가에 나와 있는 닝게토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영락없는 시골 할머니였다. 휴대폰을 목에 건 그 백발의 할머니는 검은색 고무털신까지 신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추운데 어서 들어오세요.” 능숙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그를 따라 조립식 가건물인 닝게토의 집에 들어서자 11마리의 개들이 동시에 짖어댄다. 그중에는 전 주인이 성대수술을 해줘 제대로 소리를 못 내고 헉헉거리는 녀석도 있다. 길거리에 버려지고, 동물병원에 버려진 개들을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 것이 벌써 9마리째다. 원래 키우던 2마리까지 합쳐 이제는 11마리의 대가족이 됐다. 개들 때문에 어수선한 살림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 개들이 사는 집에 사람이 얹혀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곳에 9년 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타종행사에 섰던 그가 살고 있는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1 가난했던 한국, 그러나 정은 넘쳤다



1946년 스위스 라이미스빌에서 태어난 닝게토는 한국이란 나라를 전혀 알지 못하는 평범한 간호사였다. 1972년 당시 독일과 스위스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들과 같은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인 간호사들로부터 한국어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75년, 한국을 처음 찾아 두 달간의 휴가를 보냈다. 서울 종로 동숭동의 달동네에서 지냈다는 그는 오래 전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말도 못하게 가난했어요.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힘들 때였죠. 그러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많이 했어요. 외국인이 별로 없을 때인데도 동네사람들이 ‘이리 오세요, 이리 오세요’하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요. 예닐곱의 가족이 단칸방에 살면서도 정이 많았어요.”



사람들의 정에 이끌려 한국을 드나들던 닝게토는 한국 아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번 돈으로 대구와 부산의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도왔다. “후원자가 없으면 애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일하러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후원을 시작했어요. 열 살이 조금 넘은 어린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렇게 조금씩 한국과의 인연을 다지던 닝게토는 1985년 아예 짐을 싸들고 한국에 와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이렇게 오래까지 여기서 살게 될 줄은 몰랐죠. 제야의 종을 친다든지 방송에 나간다든지 하면서 유명해질 거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고 싶었는데 ….”



지난 14일 닝게토 할머니가 전북 군산시 대야면 집 앞 골목길에서 유기견들과 산책하고 있다. 아래는 지난해 몽골에 가서 후원 중인 쌍둥이 자매와 찍은 기념 사진. [최명헌 기자]




#2 다 주지 못한 ‘엄마의 사랑’



전남 광주 영진육아원이 그의 첫 근무지였다. 닝게토는 거기서 간호사로 일하며 부모들이 팽개친 한국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 뒤로 광주 베텔타운양로원, 울산 울주군의 장애인시설 화정원, 경기도 용인보육원, 전북 군산의 장애인시설 구세군캐더린목양원(현 군산 목양원)등, 2003년 은퇴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대한민국 곳곳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장애인, 노인들을 보듬었다. 목양원에서 닝게토와 함께 일한 김경열 생활재활교사는 “처음에는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왜 저런 고생을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조절을 못해 속을 썩이는 정신지체아들에게도 화 한 번 내지 않으시고 다독여주는 선생님 모습에 그분 뜻을 조금씩 알게 되었죠”라고 말했다.



닝게토는 특히 용인보육원에 있을 때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과 함께 지냈는데 마음 아픈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알코올중독 아버지, 낳자마자 버린 엄마 등, 상처투성이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그 중에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교도소를 들락거리거나 나쁜 길로 빠진 아이들도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그의 마음을 악용한 아이들도 있었다. “제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건 ‘엄마의 사랑’이었는데 몇몇 아이들은 저에게 돈만 원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어느날 갑자기 전화해 도와달라는 아이에게 돈을 보내주고 나서 연락이 끊기거나, 물건을 훔친 아이 때문에 경찰이 그를 찾는 경우도 있었다. 성공한 아이들은 그들대로 보육원 시절을 잊고 싶어하는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6년 동안 수백 명의 아이들을 돌봤지만 지금 그를 찾는 한국 아이는 거의 없단다.



요즘 그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는 건 몽골·말라위·스리랑카·에티오피아 등 다른 나라의 아이들이다. 그의 집안 곳곳에는 결연후원아동의 사진과 프로필, 아이들이 직접 그려 보낸 그림들이 걸려있다. 닝게토는 현재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을 통해 27명의 해외아동을 1대1 결연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스위스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이 수입의 전부인 그에게 매달 65만원의 후원금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한국 아이들에게는 이제 3만원으로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하지만 그곳 아이들은 사흘에 한끼밖에 먹지 못하고 후원자가 없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죠. 그들을 후원하지 않으면 제가 더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꿈을 지켜주는 것은 꼭 필요해요.”



#3 스위스, 몽골 그리고 한국



닝게토가 국적을 불문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이유는 어린 시절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부모를 만나고 싶다”고 할 정도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부모 때문에 친척집이나 아동시설에 머물기도 했고 아버지는 여동생과 자신에게 몹쓸 짓까지 했다. 고국인 스위스를 방문한 것도 14년 전 모친상 때가 마지막이다. 그가 30여년간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한국은 그 자신에게 ‘치유의 땅’이기도 했던 셈이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한 가지 확실해진 게 있어요. 나는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준 것 보다 몇 배 이상의 것을 아이들로부터 받고 있다는 거죠. 몇 해가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아이들의 눈빛과 그들이 저에게 줬던 순수한 사랑 말예요.”



그는 요즘 후원하고 있는 몽골 아이들을 위해 몽골어 공부에도 한창이다. 그들을 만나려고 몽골에도 벌써 5번이나 다녀왔다. 여력이 된다면 남은 생을 몽골에서 보내고 싶은 소망도 있다.



나눔·복지·봉사 등의 단어가 낯설던 1970~80년대 부터 30여년간 한국 사회를 지켜본 그는 요즘 안타까운 점이 많다고 했다. “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많이 만났는데, 찾지도 않는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지원을 못 받는 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게다가 나이 많은 노인들이 길에서 박스를 주워 몇 천원을 벌어야만 살 수 있다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얘기죠.” 그는 또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가난한 사람이 참 많았어요. 하지만 행복해하는 사람도 많았죠. 그런데 요즘 한국은 그때보다 부자가 됐을지는 몰라도 불행한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밥 한 숟갈씩이라도 모아 다른 사람을 도왔는데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2012년 새해를 앞둔 현재, 타종행사에 섰던 ‘스위스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도, 수십년 동안 남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그를 찾는 사람도 거의 없다. 몇 해 전 인공관절 수술을 한 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홀로 보내는 그에게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저에게는 제가 돌봐야 하는 11마리의 강아지와 27명의 아이들이 있잖아요. 강아지와 아이들, 그리고 제가 서로서로 의지하며 기쁘게 사는 중이에요.”



닝게토는 2002년 타종행사 후 어느 인터뷰에서 “새해에는 한국이 좀더 평화로운 나라가 되길 바란다. 소외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모두가 기도해주었으면 한다”고 밝혔었다. 2012년 새해를 앞두고 있는 지금, 9년 전 그의 소망은 얼마나 이뤄졌을까.



군산=손지은 행복동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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