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 더 아픈 손가락

중앙일보 2011.12.22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사람마다 성격도 가지가지다.



 ‘힘들다, 아프다, 못하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징징이’가 있는가 하면, 입만 열면 ‘재미있다, 신난다, 쉽다’고 하는 ‘씩씩이’도 있고.



 전자는 남편 동생부부이고 후자는 우리 부부다. 시어머니는 ‘징징이’에게 더 맘이 가시는지 동생네를 더 챙기신다. 우리 부부가 몸이 안 좋아 추석 연휴에 제주올레 걷고 왔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는데, 똑같이 추석날 빠지고 다른 곳에 다녀온 동생네는 피곤하겠다며 닭볶음탕까지 해주시더라. 왜, 누군 야단치시고 누군 음식까지 만들어주시는지 이유를 물었다. “너희는 형이잖니. 맘도 넓고” 하신다. 부모에겐 ‘징징이’가 더 아픈 손가락인가 보다.



 내게도 그런 ‘징징이’와 ‘씩씩이’가 있다.



 지난여름, 미국에 사는 딸들 가족을 보러 갔었다. 큰딸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컴퓨터 일을 하는 남편과 살고 있고, 작은딸은 부부가 다 치과에서 일하고 있다. 작은딸 부부는 졸업한 지 6개월밖에 안 되어 그런지 너무도 바쁘고 힘들게 살더라. 아침에 우유 한 잔, 점심은 땅콩샌드위치를 싸가지고 가서 환자 옆에서 틈틈이 씹는단다. 허기를 달래는 수준이다. 집에 돌아오면 밥을 할 힘도 없어 둘이 요구르트랑 식빵을 씹어 넘긴단다. 맘이 너무 아팠다. 간 김에 며칠 잘 챙겨 먹였더니 작은애들 얼굴이 금방 예전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가 없으면 또다시 까칠해질 것 같아 6개월 먹을 음식을 해놓고 오기로 했다.



 일단 허리께 오는 냉동고를 하나 장만했다. 그 속에 돼지불고기, 닭갈비, 녹두빈대떡, 우거지된장찌개, 닭볶음탕 등을 냄비에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양념해 지퍼백에 꽁꽁 싸서 냉동고 가득 채웠다. 예쁘게 하트까지 그려가며 음식 라벨 붙이는 일은 남편이 했다. 귀국 전날 아침. 음식 마무리 후에 냉동고에 가득 찬 음식들을 보고 흐뭇해 하며 샤워를 하는데 전기가 나갔다. 씩씩한 큰애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걔, 이사 오면서 이전신청 까먹은 거 아냐? 오늘 금요일이잖아. 주말에 쉬는데 큰일이네” 하더니 알아보겠다고 한다. 작은딸 ‘징징이’는 환자를 보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 메시지를 남겨놓은 상태. 지금 신청해도 월요일 아침에 전기를 넣어줄 터인데. 전기 없는 3일 동안이면 냉장고랑 냉동고에선 물이 줄줄 흘러내려 집주인이 새로 깔아준 나무로 된 부엌바닥 값 4000달러도 물어줘야 할 것이고. 그 속에 있는 음식들은 다 상할 것이고. 돈도 돈이지만 며칠 동안 다듬고 자르고 부치고 만든 음식들. ‘징징이’ 부부가 먹고 얼굴이 뽀얗게 될 그 음식들이 너무 아까워 속상했다. 정작 주인공인 작은딸은 소식도 없다. 전기가 3일 동안 안 들어온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든 걸 서류대로 하는 미국. 아무래도 포기해야 될 것 같다.



 우울하게 짐을 싸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30분 안에 사람이 와서 연결해 준다는데, 작은딸이 우리에게 연락을 못했던 것은 담당자에게 하소연하느라 그랬단다. 엄마가 만든 음식. 너무도 안타까워서 담당 수퍼바이저에게 전화로 엉엉 울었단다. ‘돈 버리고 집 다 망가지는 건 좋지만 우리 엄마가 일주일 내내 고생해 만든 내 엄마 음식만은 버릴 수 없다고. 그것만은 꼭 지키게 해달라고.’ 그냥 막 울었단다. 수퍼바이저의 말. 주말에도 전기를 연결해줄 수 있는 예외조항 하나. 산소호흡기 사용하는 환자가 있는 곳인데 엄마 음식은 네게 산소호흡기와도 같으니 당장 해주겠노라고.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더 아픈 손가락은 있더라.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