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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ISD 소모적 논쟁 이젠 접자

중앙일보 2011.12.19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조태열
외교부 개발협력대사
30여 년의 외교관 생활을 통상협상과 국제통상분쟁 현장에서 보낸 필자에게는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사법주권 침해 논란은 뜬금없기만 하다. 문제를 제기한 인사들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세계무역기구(WTO) 시대’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 듯하다. 조세제도와 같이 전통적인 국가주권의 영역에 속했던 분야도 국경을 넘나드는 경제활동의 자유와 시장의 경쟁여건 보장을 위해선 제약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바로 WTO 시대다. 이를 차치하고라도 국제협정은 원래 협정의 목표 달성을 위해 국가 주권을 스스로 제약하겠다는 당사국들의 약속이다. 협정의 해석 및 적용에 관한 분쟁은 당사국 국내법원이 아닌 제3의 분쟁 해결 절차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상례다. 한·미 FTA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도 그러한 분쟁 해결 제도의 하나로서 투자협정상 보편화된 제도다. 이것이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그동안 우리가 체결한 수많은 조약과 국제협정이 모두 사법주권을 침해한 것이란 말인가.



 ISD 중재판정은 투자유치국의 부당한 조치에 따른 손실 보상이나 손해 배상을 명령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WTO 분쟁패널의 판정은 패소국의 법령과 제도를 변경하도록 명령할 수 있고, 해당국은 이를 이행할 의무가 있으며, 이행하지 않을 경우엔 상대국의 보복 조치까지를 허용하고 있다. 주권 제약이란 측면에선 오히려 ISD보다 더 강력한 제도다. 그렇다면 WTO 분쟁패널에 대해서는 왜 그동안 침묵했는지 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ISD가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이 그동안 ISD에 제기한 분쟁 중에서 승소한 건 15건뿐이고 22건에서 패소했다. WTO에서도 미국의 승소율은 50%에 미치지 못한다. 미국에 편파적인 제도라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필자는 WTO의 미·EU 호르몬 분쟁에서 재판장을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국제중재패널의 공정성을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



 미국의 이행법이 ‘협정보다 미 연방법이 우선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등 조약이라는 주장도 미국 법제도의 특수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WTO 협정이나 NAFTA의 이행법에도 동일한 규정이 있는데 지금까지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미국은 1995년 WTO 출범 당시 ‘향후 WTO에 회부되는 분쟁에서 세 번 이상 패소하면 WTO를 탈퇴한다’는 법안까지 논의했던 나라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십 건의 패소에도 불구하고 WTO 탈퇴는커녕 패널 판정의 이행을 거부한 적도 없다. 미국이 자국의 법과 제도를 고치라는 WTO 패널 판정을 거부하지 않고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이행법 체제와 ISD 중재에 대한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조태열 외교부 개발협력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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