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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슬픈 크리스마스

중앙일보 2011.12.19 00:00 종합 39면 지면보기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광야의 양치기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며 탄생한 예수는 광야의 사람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광야에서 악령의 유혹을 이겨낸다. 산과 들과 호숫가를 떠돌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신의 음성을 들려주던 예수는 마침내 예루살렘 성문 밖 광야 어귀에 있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다. 예수의 자리는 화려한 궁궐이 아니라 거친 광야였다.



 선거철이 가까워오자 엉뚱하게도(?) 종교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가르치는 스님이 정치권의 멘토가 되어 바쁘게 움직이고, 영성(靈性) 깊은 목사님들은 기독교정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정작 예수 자신은 기독교정당의 등장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를 따르는 군중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예수는 그 기막힌 정치적 기회를 뿌리치고 군중을 멀리 떠난다.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그 사람은 왕궁에 있다.”(마태 11). 이것이 예수가 제시한 광야와 궁궐, 신앙과 정치의 날카로운 대조다. 헤롯의 왕궁, 총독 빌라도의 궁정, 산헤드린 공의회에 소환된 예수의 자리는 높은 귀빈석이 아니라 초라한 피고인석이었다. 그 피고인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요한 18)



 기독교정당의 강령 중 하나가 종북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나름의 애국심일 수 있다. 그러나 조국이 로마의 압제로 신음하던 시절, 예수는 열심당(Zealot) 같은 정치적 결사(結社)에 가담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낼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에도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신앙의 가르침으로 답했다. 오늘날 같으면 당장 ‘조세(租稅) 주권을 외적에게 팔아먹는 매국노’로 내몰리지 않을까?



 중세의 교황정치는 유럽을 암흑시대로 몰아넣었고, 장 칼뱅의 제네바 통치는 이단 처형의 핏빛으로 얼룩졌다. 역사의 어느 모퉁이에서도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모두 거머쥔 사제(司祭)정치가 성공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오직 저 광야에서 울려오는 공의(公義)의 외침만이 세속권력을 두렵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1971년 12월, 한겨울 추위처럼 음산한 국가비상사태하의 성탄절 전야(前夜), 유신체제로 치닫는 정치권력을 준열하게 꾸짖던 고 김수환 추기경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굴절된 역사의 고비마다 시대정신을 일깨우던 그의 목소리가 기독교정당 열 개보다 더 큰 힘이 있었다. 거리와 광장에서 촛불 한 번 켜든 적이 없었던 추기경의 목소리가.



 갈등과 대립, 분노와 증오의 먹구름으로 뒤덮인 우리 사회에 위로의 빛, 치유의 소금으로 다가가야 할 교회들이 이 정권 초기부터 사회 갈등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대통령과 교회지도자들의 공동책임이지만, 누구도 진솔한 뉘우침의 자세를 보인 적이 없다. 더욱이 교계 일부의 비리·탈선은 거의 절망적이다. 이름난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횡령·배임·폭력·추행 따위의 의혹으로 고소 사태에 휘말리는 실정이다.



 고뇌의 밤을 뒤척이고 참회의 새벽을 열어도 아쉬운 터에 납세의무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직자들이 정당을 만들어 나랏일까지 떠맡아야 할까? 독일에도 기독교민주당이 있지만, 독일 국민의 65%가 교회세(敎會稅)를 내는 신자일 뿐 아니라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보수를 받는 독일의 성직자들이 종교의 직을 지닌 채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일은 거의 없다.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갈라서자 “예수와 그리스도(기독)가 싸운다”는 야유를 받다가, 예수교장로회가 다시 통합파와 합동파로 나뉘자 “분열의 이름이 하필 통합이고 합동이냐”라는 비판을 들었던 것이 한국 교회의 아픈 역사다. 개신교의 뿌리인 종교개혁 정신이 오늘의 한국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정당이나 정치종교인의 활약이 아니라 교회와 목회자들 자신의 엄중한 신앙개혁, 뼈를 깎는 자기혁신일 것이다. 사제나 승려의 옷을 입은 채 장외(場外)에서 실질적인 정치활동을 벌여오고 있는 교조적(敎條的) 이념의 종교인들에게도 깊은 성찰이 요청된다.



 왕관을 거부하고 가시관을 쓴 채 죽어간 광야의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신앙일진대, 고백과는 정반대로 ‘광야를 버리고 의사당으로’ 달려가려는 종교인들의 정치실험이 뿌리 깊은 사회적 불신을 극복하고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실패의 예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실패가 ‘다행’으로 여겨지다니 이런 ‘불행’이 있는가? 그 씁쓸한 엇갈림 속에 크리스마스가 슬프게 다가온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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