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7) ‘구조조정 저승사자’의 호출

중앙일보 2011.12.15 00:27 종합 12면 지면보기
‘저승사자의 호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이헌재(오른쪽) 기획단장과 30대 그룹 기조실장들의 간담회를 당시 언론은 이렇게 불렀다. 1998년 2월 9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실에 마련된 간담회장에서 이 단장이 실장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그는 이날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하라”고 기조실장들을 압박했다. [중앙포토]


1998년 2월 9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실에 들어서자 좌중의 눈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30 명이 모여 있었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늦거나 빠진 사람도 없었다. 대한민국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30대 그룹, 그곳의 일선 사령관 격인 기획조정실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 나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예외는 없다. 기대를 줘선 안 된다.’

30대 그룹 기조실장 한자리에 불러 일방 통보



 애초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생각이 바뀐 건 며칠 전 삼성그룹 실무진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의 기획담당 간부가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는 “삼성은 아무 문제가 없다. 놔두면 알아서 위기를 극복할 거다. 시장이 좋아지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삼성은 구조조정이 필요 없고 생각도 없다는 통보였다. ‘이건 아니다. 재벌들의 현실 인식이 이렇다면 큰 문제다. 아주 강하게 그립을 쥘 수밖에 없다.’ 이때 나는 악역을 결심했다.



 이 모임을 두고 누군가는 ‘저승사자의 호출’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청와대와 재벌 총수의 대리전’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어떻든 목적은 하나였다. 약속을 받는 것이다. 내가 이날 전한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번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해 주십시오. 그 계획대로 구조조정을 실천해 주십시오. 결과는 시장이 평가할 것입니다.”



 바로 ‘은행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이다. DJ 정권의 재벌 다루기가 첫 단추를 끼우는 자리였다. 구조조정 계획을 받기만 하면 된다. 내용은 상관없었다. 기업 스스로 구조조정 계획을 만들게 하는 것, 그래서 주거래 은행이 그 계획을 점검하게 하는 것, 이게 핵심이었다. 그 순간 기업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은행에 맡기게 된다. 은행을 우습게 알던 때였다. 웬만한 은행장이 대기업의 자금 담당 이사 만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은행과 기업의 관계는 크게 역전된다.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 제출. 빠듯한 마감 탓일까. 몇몇은 이미 얼굴색이 안 좋아졌다. 침묵을 깨고 누군가 손을 들었다. 한진이었다. “원화가치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비행기를 사려면 큰돈을 빌려야 합니다.” 좀 봐달라는 얘기를 에둘러 한 것이다.



 한번 침묵이 깨지자 웅성웅성, 여러 곳에서 불만이 나왔다. 한 해운회사 기조실장은 “해운 쪽은 주로 배를 빌려 장사를 하는 만큼 빚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제조업과 같은 잣대로 따져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건설회사 쪽에선 “자금이 서로 물고 물면서 돌아가는데, 부채 비율 맞추기 위해 딱 끊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호소했다.



 내가 말을 잘랐다.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라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재무 구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기업은 영원히 큰 빚을 지고 살아도 된다는 얘기입니까.” 언성을 높이자 몇몇이 땀을 닦기 시작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나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진심이었다. 출발부터 예외를 인정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일단 출발을 해 놓으면, 예외는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다. 처음부터 예외를 인정하면 그게 원칙이 된다. 항공회사 사정을 봐주면 해운회사, 건설회사는 사정이 없겠으며 전자회사나 자동차회사는 할 말이 없겠는가.



 “기한을 넘겨선 안 됩니다. 오너의 도장을 찍어 가져오십시오.” 책임을 총수에게 묻겠다는 ‘엄포’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올해 3월부터는 그룹 내 신규 상호지급보증은 없습니다. 은행에서 자기 신용으로 돈을 빌리든지 대출을 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납니다.”



 기조실에 대한 말도 했다. “정부가 기조실·비서실을 폐쇄하라는 건 아닙니다. 강제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외국 투자가 눈에는 정상적인 조직으로 비춰지지 않습니다.” 사실상 폐지하라는 압력이었다. 당시 재벌 그룹의 기조실은 그룹 전체의 의사결정을 총괄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였다. 이런 조직을 그대로 두고선 오너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폐쇄 시기까지 못 박아줬다. “주총이 2월 말일 경우 정관 변경이 어렵겠지만, 3월 이후 주총을 하는 경우에는 2월 임시국회 입법 내용에 따라 변경이 쉽게 될 겁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모른 척, 애써 무시하며 회의장을 나왔다. 기조실장들의 표정이 복잡했다. 두려움, 억울함, 서러움 같은 것들이 뒤범벅된 듯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게임에서 나는 악역이다.’



 이미 대통령 당선자는 “재벌 개혁을 결코 흐지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 그리고 그 개혁의 최전선에 내가 서 있었다. 일부러라도 모진 말을 던질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나의 저승사자 노릇은 효과가 있었다. 닷새 만에 대부분 기업이 구조조정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해서 재벌 구조조정은 은행의 손으로 넘어오게 된다.



만난 사람=이정재 경제부장

정리=임미진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