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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DJ에 "거짓말쟁이 아닌가?" 묻자…

중앙일보 2011.12.14 01:06 종합 4면 지면보기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지난 9월 19일 포항 포스코 체육관에서 열린 퇴직 임직원들을 위한 문화행사 ‘보고 싶었소! 뵙고 싶었습니다. 재회’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며 인사하고 있다. 박 명예회장이 재직했던 1993년 2월까지 근무했던 직원 370여 명이 초청된 이날 행사에서 박 회장은 19년 만에 만난 퇴직 직원들과 재회하며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공정식 프리랜서]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민자당 최고위원, 포스텍 설립자…. 그 어떤 직함도 그의 이름 세 글자보다 빛을 내진 못한다. 박태준,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리더였다. 1990년 11월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서울로 특사를 파견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훈장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를 그에게 수여했다. “한국이 군대를 필요할 때 당신은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기업을 찾을 땐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미테랑의 치사는 박태준의 삶을 꿰뚫었다. 20대의 그는 6·25전쟁에 참전해 치열한 전투를 겪은 ‘총의 사나이’였다. 그때 가슴에 새긴 인생관이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였다.



전시엔 장교로, 경제 부흥기엔 경영자로, 비전 필요할 땐 정치인으로 국가에 답했다

박태준 1927~2011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 바친 박태준



# 박태준과 박정희



 92년 10월 2일 박태준 당시 포철 회장은 광양제철소에서 1만2000명의 손님을 모시고 ‘포항제철 4반세기 대역사 준공식’을 치렀다. 68년 시작된 포항제철 건설은 연간 2100만t의 생산능력을 확보하게 된 광양4기 설비 준공식으로 마무리됐다. 25년 만의 대역사였다. 그러나 그에겐 더 중요한 행사가 남아 있었다. 이튿날 그는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넥타이, 검은 양복 차림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대통령 묘 앞에 섰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셨고, 또 다짐 드린 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는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임무 완수를 보고한 92년 10월 3일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장면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박정희를 만난 건 스물한 살 때인 1948년. 그는 육군사관학교 6기 생도로, 박정희는 탄도학을 강의하던 교관이었다. 인연은 박정희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이 60년 박태준을 데려다 인사참모로 쓰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61년 5·16 때 박정희는 박태준을 거사자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대신 “실패할 경우 내 처자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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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강인 박태준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책임질 테니 자네는 제철소를 맡게. 제철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임자는 할 수 있어.”(본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편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중에서)



 67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을 종합제철소 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며 한 이 말은 ‘철강인 박태준’으로서의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박태준은 대한중석 사장, 포항제철 사장을 거치며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라는 인생관에 ‘제철보국(製鐵報國)’을 추가했다.



 자금조달 단계부터 난관이 이어졌다. 그는 69년 차관 교섭차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하는 ‘하와이 구상’을 한다. 대통령의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당초 농림수산업에만 쓰기로 한 일본과의 합의가 문제였다. 이 돈을 제철소 건설에 쓰려면 일본 내각의 만장일치 동의를 구해야 했다. 그는 일본 주요 정·재계 관계자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회고록에서 “보는 이들이 안타까워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의 진지한 노력에 일본은 감동했다”고 썼다. 결국 박태준은 대일청구권 자금과 은행 차관 등 1억2370만 달러로 제철소 건설에 나섰고 73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를 준공해 첫 쇳물을 생산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우향우 정신’은 전설로 남아 있다. 직원들에게 제철소 건설이 실패할 경우 ‘우향우’해 동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을 각오로 일하라고 독려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는 2003년 7월 포스코 역사관 개관식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제철소 사업에 실패하면 차라리 영일만에 빠져 죽자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고 여러분 모두의 혼에 우향우 정신을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포스코의 성공신화 못지않게 기업인 박태준을 돋보이게 하는 건 신앙처럼 고집했던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대한 신념이다. 그는 포스코 회장 재임 중은 물론 퇴임 뒤에도 포스코 주식 보유를 철저히 거부했다. 88년 포스코 직원 1만9419명이 발행 주식의 10%를 우리사주로 배정받을 때도 그는 단 한 주도 받지 않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위 관계자는 “철저히 사욕을 버리고 나라의 부(富)를 쌓는 데 일생을 바친 국가대표급 전문경영인”이라고 평가했다.



 # 박태준과 김영삼



 박태준이 정치에 입문한 건 53세인 80년이었다. 신군부 세력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을 거쳐 81년 민정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시작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자기가 일군 포철을 외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의 정치는 성취보다 좌절이 많았다. 보람은 짧았고, 배신과 분노, 불신은 길었다.



 가장 모질었던 건 동갑내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었다. 두 사람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으로 한솥밥을 먹게 됐다(90년). 92년 봄 노태우 대통령은 민자당 대선 경선을 앞두고 박태준 당시 최고위원에게 ‘당신도 나가 보라’고 언질을 줘놓곤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반발하자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게 박 전 총리의 생전의 회고였다.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92년 겨울 대선 후보인 김영삼이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그는 세무조사를 당하고 외국을 떠돌아야 했다.



 세월이 바뀌어 97년 여름. 김영삼은 아들의 비리와 외환위기로 식물 대통령이 됐다. 박태준은 귀국해 포항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해 명예를 회복했다.



 # 박태준과 DJP



 97년 9월엔 김대중 국민회의 대선 후보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수락했다. 김대중-김종필의 이른바 DJP 공동정권 만들기에 또 다른 축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때 김대중 후보에게 ‘당신은 거짓말쟁이 아닌가’ ‘당신의 색깔은 진짜 어떤 색깔인가’ ‘당신이 집권하면 호남 사람들이 통·반장까지 다 해먹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등 다섯 가지 항목의 질의응답을 했다는 ‘면접시험’은 유명하다.



 김대중 대통령 시대, 박태준은 자민련 총재(98~2000년)→국무총리(2000년)를 거쳤다. 그는 정치부패를 줄일 선거 완전 공영제와 지역정치를 타파할 중선거구제 도입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정치개혁은 결정적 순간 현실론을 앞세운 국회의원들의 집단반발과 공동여당(새천년민주당·자민련) 오너인 DJP의 발 빼기로 실현되지 못했다. 80년 시작된 그의 정치생활은 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 산업화 + 민주화 통합 비전



 박태준은 정치를 하면서도 이상과 원칙을 관철하려 했다. 그의 비전은 박정희의 유산인 산업화 세력과 김대중·김영삼이 이끌었던 민주화 세력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산업화 세력에서 부패성향을 제거하고, 민주화 세력에 먹고사는 것과 성장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지역구도를 극복하고 부패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도 ‘산업화+민주화’의 통합 비전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후세에 남기고 싶은 말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독재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고, 빈곤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라.”



전영기·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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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박태준
(朴泰俊)
[前] 포스코 명예회장*사망
[前]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사망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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