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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6) 기업 구조조정 5원칙의 비밀

중앙일보 2011.12.14 00:53 종합 12면 지면보기
1998년 1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4대 그룹 총수와 조찬을 하며 ‘기업 구조조정 5원칙’에 합의할 것을 요구한다. “은행을 통해 재벌을 움직인다”는 DJ식 재벌 개혁 프로그램이 막을 올린 것이다. 왼쪽부터 구본무 LG회장, 박태준 자민련 총재, 정몽구 현대 회장, 김대중 당선자, 이건희 삼성 회장, 최종현 SK 회장. 김우중 대우 회장은 “외자를 유치해 오겠다”며 외국에 나가 있었다. [중앙포토]


1998년 1월, 재벌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선은 많이 차가웠다. ‘재벌=환란 죄인’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500%를 넘나드는 부채비율, 문어발식 확장, 무분별한 외자 차입…. 은행을 망가뜨리고 나라 경제를 망가뜨린 주범이 재벌이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꼭 개혁해야 할 대상. 당시 국민 눈에 비친 재벌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내외 언론은 연일 재벌 개혁에 대해 써댔다. 그럴 때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 된 DJ의 생각은 어땠을까. 좀체 속내를 비치지 않는 그였지만, 재벌 개혁과 관련해선 강하게 고삐를 죄곤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DJ는 재벌을 직접 다루고 싶어 했다. 거기엔 개인적 섭섭함도 담겼을지 모른다. (※편집자주:야당 후보시절 DJ는 5대 재벌인 현대·삼성·대우·LG·SK 총수에게 몇 차례 면담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당선자 DJ는 재벌을 직접 다루고 싶어 했다



 그런 DJ의 생각을 꿰뚫고 있던 이가 김용환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은 98년 새해가 되자 일산 자택으로 DJ를 찾아가 “당선자 시절부터 재벌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DJ는 “그럽시다”고 받았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DJ를 만난 직후 나를 찾았다. 그는 “이틀 안에 기업 구조조정 원칙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서근우를 불렀다. 금융연구원에서 일하던 서근우는 내 부름을 받고 비대위 기획단에 파견 나와 있던 중이었다.(서근우는 몇 달 뒤엔 금융감독위원회 제3심의관이 돼 5대 재벌 구조조정을 총괄하게 된다.)



 “기업 구조조정 원칙을 만들어야 할 텐데, 이 정도면 어떨까. ①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②상호 지급 보증 해소 ③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④핵심 역량 강화.”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거기에 실천 원칙을 추가하면 어떨까요.”



 그래서 정해진 게 ①기업 스스로 한다 ②정부는 가이드라인만 제시한다 ③수단은 은행을 통해서 한다는 실천 3원칙이다. 그러나 김용환 대표나 DJ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김용환 대표는 4원칙에 ‘기업주의 책임 강화’를 추가해 5원칙으로 만들어 DJ에게 보고했다. DJ는 “5항을 좀 더 강하게 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의 5항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강화’가 탄생한다. DJ는 5항을 통해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을 압박하고 싶어 했다.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 하기야 이만큼 정치적 효과가 큰 것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이 좀 달랐다. DJ는 5항을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는 2항, 3항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5대 그룹이 자기책임하에 지급보증을 해소하고 부채를 줄이려면 오너의 사재출연은 필연이다. 그래서 일부러 5항을 뺐다.” 나는 김용환 대표를 통해 DJ를 설득했다.



 “재벌 구조조정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박정희도 몇 번 실패했다. 전두환도 못 했다. 정권이나 권력이 직접 재벌을 다루기 시작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재벌과 권력 간 협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 재벌은 ‘이만큼 하겠다’고 하고, 권력은 ‘그 정도면 되겠다’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결국 정부가 지게 된다. 정부-재벌 간 협의에서 정부가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걸 막고 제대로 개혁을 해내려면 시스템에 의해 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좋은 건 은행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김용환 대표와 DJ는 나의 이런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만이 구조조정 5원칙의 작동 원리와 효과·위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DJ는 며칠 뒤인 1월 13일 국회회관에서 4대 재벌(대우 김우중 회장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과의 만남, 2월 초 63빌딩에서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기업 개혁은 은행을 통해서 하겠다”고 말한다. 시스템에 의한 재벌 개혁의 의미를 충분히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당시 김용환 대표와 DJ는 “5항을 꼭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재벌 총수의 사재를 털어내는 정치적 효과, 환란 극복을 위해 국민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해야 했던 두 거물 정치인들로선 피할 수 없는 선택이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던 셈이다. 문제는 그 바람에 재벌 구조조정이 애매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난 사람=이정재 경제부장

정리=임미진 기자





등장인물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되며 정치계에 입문한다. 71, 87, 92년 대선에서 낙선하고 97년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선과 동시에 숨돌릴 새 없이 외환위기 극복에 총력을 다한다. 나는 그를 금융감독위원장,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2년여간 보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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