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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화요칸중궈(看中國)] 남의 영토 치고 들어가 담 쌓고 “내 땅”

중앙일보 2011.12.13 01:01 종합 8면 지면보기
1907년에 촬영한 만리장성이다. 변발을 하고 성을 둘러보는 청나라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위키피디아]


중국의 담은 유별나다. 담은 중국인의 의식 구조와 실생활의 모든 구석에 들어서 있다. 17세기에 중국을 방문했던 연암 박지원은 “3리(里)마다 성이 들어서 있다”고 감탄했다. 낯선 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인이 둘렀던 담의 총체적인 상징은 만리장성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 견고한 담이다. 중국인은 왜 그런 담을 쌓았을까, 그리고 현재의 중국인은 어떨까.

유광종의 중국 뒤집어보기
중국인과 담 DNA <상> 만리장성이 길어지는 까닭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 즐비한 게 당시(唐詩)의 세계다. 그중에서도 시인들이 서로 절창(絶唱)이라고 치켜세우는 작품이 있다. 서역(西域)으로 먼 길을 떠날 친구와의 이별을 주제로 한 왕유(王維·701~761)의 시다.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 잔 드소, 서쪽 양관 나서면 친구가 없음이라(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중국시가선』, 지영재 편역, 을유문화사)



 시에서 등장하는 양관이라는 곳은 당나라 때 옥문관(玉門關)과 함께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이 서북 지역의 이족(異族) 세력들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아울러 만리장성의 대표적인 관문이다. 이곳을 통해 서쪽의 먼 곳으로 나가는 친구를 배웅하며 시인 왕유는 그렇게 소회를 시로 적었다.



 “자고로 전장에 나간 사람 몇이나 돌아왔소(古來征戰幾人回).”(같은 책)라고 물었던 같은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의 마음과 비슷하다. 생사(生死)를 가늠할 수 없는 위험한 지역으로 떠나는 사람에 대한 우려가 듬뿍 담겨 있다. 이른바 변방 요새를 나서는 출새(出塞)의 노래다.



 그 지리적 배경은 만리장성의 서쪽이나 북쪽 관문이다. 문을 벗어나면 바다처럼 막막하게 펼쳐져 있는 사막과 광야다. 그 너머에는 늘 중원(中原)의 재물과 곡식을 노리며 덤벼드는 서북방의 유목민족이 버티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막는 튼튼한 경계선, 만리장성은 중원의 사람들에게는 물리적이면서 심리적인 방벽(防壁)이었다.





 인공적으로 쌓은 담의 모든 길이는 6254㎞, 평균 높이 6~9m, 평균 폭 4~5m인 만리장성은 천안문(天安門)과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과 함께 중국을 상징하는 얼굴이다. 그런 만리장성은 기원전의 춘추전국시대에 시작해 진시황 이후의 역대 왕조를 거쳐 명나라 때까지 쌓은 건축이다. 중국인이 2000년 넘게 꾸준히 쌓은 중국인만의 방벽이다.



 남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벽, 담의 구조는 중국인이 생활을 위해 짓고 살았던 전통적인 주택에 매우 잘 드러나 있다. ‘중국인의 집’ 특집(본지 10월 4일자부터 11월 29일까지 8면에 화요일 격주로 연재)에서 살펴본 내용 그대로다. 그러나 집뿐이 아니다. 마을과 도시 곳곳에도 들어섰고, 나아가 왕조의 국체를 보호하는 만리장성의 거대하며 긴 담으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중국인의 담에 대한 정서는 특별하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왕조의 창업을 이루기 전 주승(朱升)이라는 은자(隱者)와 만난다. 그에게 국가를 경영하는 방도를 묻기 위해서였다. 주승은 이런 말을 남긴다. “높이 담을 쌓고, 식량을 모으며, 늦게 왕을 칭하라(高築墻, 廣積糧, 緩稱王).”



 ‘식량을 모으고, 왕을 늦게 칭하라’는 말은 역량 쌓기에 노력하라는 충고다. 그에 앞서 주승이 제시한 것은 ‘담을 높게 쌓으라’는 얘기다. 병력과 주민을 먹여 살리는 식량을 비축하고, 정세를 잘 파악해 주변 세력으로부터 반감을 사지 말라는 내용의 두 가지 제안에 앞서 먼저 방벽 쌓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성을 쌓는 축성(築城)에 관한 사고는 중국 역대 왕조에 고루 드러난다. 사람의 뜻을 한데 모아 성을 쌓는다는 뜻의 ‘중지성성(衆志成城)’의 성어가 늘 유행했던 이유다. 모든 사람이 단결하면 성벽을 이룬다는 뜻의 이 성어에서 ‘방벽’ ‘담’ 등이 중국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비단 과거의 왕조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 중국의 집권자인 공산당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위기의식을 강조할 때 늘 이런 구호를 내세웠다. “깊이 굴을 파고, 식량을 모으며, 함부로 패권을 내세우지 않는다(深?洞, 廣積糧, 不稱覇).”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늘 주창한 말이다. 주승이 주원장에게 건넨 충고와 비슷하다.



 현대 중국의 국가(國歌)에도 이 말은 등장한다. ‘의용군행진가(義勇軍行進歌)’로 불리는 이 중국의 국가에는 “우리의 피와 육신으로, 우리의 장성을 쌓자”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에게 가장 고귀한 피와 육신으로 새롭게 쌓자는 게 결국 길고 굳건한 방벽이자 담이다.



 담을 쌓는 심리는 자신의 것을 지키자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먼저 지켜야 생존의 근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점에서 역대 왕조의 담 쌓기 심리, 현대 중국인들의 ‘혈육장성(血肉長城)’의 감성과 논리는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중국인의 담이 남의 영역을 먼저 치고 들어가 선점(先占)하려는 ‘확장의 담’일 경우에는 늘 문제였다. 만리장성이 들어선 지역이 원래의 중원 지역 중국인 거주지가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족이 거주하던 곳이라는 조사 결과는 그를 잘 말해 준다. 중국인들이 유목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 방벽을 쌓은 뒤 담 밖으로 그들을 밀어냈다는 얘기다. 만리장성 이남 지역에서 발굴되는 북방 유목민족들의 생활터전 등을 감안해 내린 결론의 하나다.



 장성의 길이도 논란거리다. ‘서쪽 끝 가욕관(嘉?關)에서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이라는 만리장성의 전통적 길이 개념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요즘의 중국은 동쪽 끝 산해관에서 랴오닝(遼寧)과 지린(吉林)을 지나 압록강까지 이어지는 선을 만리장성에 이어 붙였다. 총연장을 8800여㎞라고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장성의 흔적이 없던 곳에 들어선 이런 ‘유동적인 담’은 중국과 이웃으로 살고 있는 한국과 주변국들의 경계감을 자아낸다. 유목민족의 생활터전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곳에 담을 쌓은 뒤 “이곳이 내 영역”이라고 주장했던 ‘확장성(擴張性)’의 만리장성이 다시 들어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30여 년의 과정을 거치며 강력하게 부상했다. 활력 넘치는 경제력으로 국가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 넘치는 힘이 이제는 동남아와 태평양, 인도양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가는 중이다. 그런 중국이 이제 어디에 어떤 담을 쌓을 것인가. 세계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뜨거운 주제다.



유광종 선임기자





◆양관(陽關)=서역에서 중국으로 진입하는 실크로드의 남쪽 루트 마지막 관문이다. 지금의 중국 둔황(敦煌)시 서남쪽에 있다. 서역에서 오는 상인들이 중국으로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거쳤던 곳이다. 북쪽의 옥문관에 비해 위도상으로 남쪽이어서 남향(南向)을 뜻하는 ‘양(陽)’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주둔 병력과 상인들로 매우 번성했으나 서역과 교역이 줄어든 송대에 들어 쇠락했다. 현재는 봉화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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