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늦게 핀 꽃 원성진, 소리 없이 세계를 베다

중앙일보 2011.12.09 00:53 종합 31면 지면보기
바둑기사라면 내리막이라는 26세. 하지만 원성진 9단은 26세에 첫 세계타이틀을 따냈다. 삼성화재배 우승트로피에 입맞추고 있는 원성진의 얼굴이 금빛으로 빛난다.
5~7일 상하이에서 열린 제16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에서 한국의 원성진 9단이 중국의 구리 9단을 격파하고 우승하면서(본지 12월 8일자 20면) 한국은 올해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라이벌 중국에 네 번 모두 승리하는 쾌거를 이뤘다. BC카드배와 춘란배에서 이세돌 9단이 구리와 셰허를 꺾었고, 후지쓰배에선 박정환 9단이 추쥔 8단을 꺾었다.


구리 9단 제압 삼성화재배 우승

 이 점에 대해 중국 기사들이 구리에게 물었다. 이건 기술의 문제냐, 승부 기질의 문제냐. 좋은 바둑을 역전당한 구리는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한국 기사들은 큰 승부에서 중국 기사들보다 과감하다.”



 원성진 9단은 세계대회 결승 진출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우승에 목말랐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하나 이번 승부에선 배짱 좋기로 소문난 구리보다 훨씬 과감하고 단호했다.



 1국에서 대마 포획을 결심하고 일직선으로 밀고나간 것은 ‘원 펀치’의 백미였다. 2국은 졌으나 최종국에서 보여준 ‘뒤집기’도 놀라운 뚝심이었다. 3국에서 진 구리는 항복할 무렵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고통의 흔적이었다. 구리는 그러나 패하고도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하며 “올해는 한국이 4대0으로 이겼지만 전체적인 전력은 양국이 엇비슷하다”고 말했다.



구리 9단
 3국이 원성진의 명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중반에 행마가 나빠 구리의 페이스에 끌려다녔고, 어떤 측면에선 거의 지옥문 근처까지 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구리는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원성진은 그 흔들림을 정확히 포착하고 응징하며 드디어 형세를 뒤집었다.



 그 긴 여정은 ‘대기만성의 전형’으로 꼽히는 원성진 본인의 바둑 인생과 흡사했다. 프로 생활 13년 만에 세계대회 첫 우승의 꿈을 이룬 원성진은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힘 주어 말했다.



 이번 삼성화재배는 16강전에서 이창호 대 구리, 이세돌 대 쿵제가 맞붙어 이창호-이세돌이 모두 졌다. 이때 16세 소년기사 나현 초단이 쿵제 9단을 격파하고 4강까지 치고 올라갔다.



 한국 바둑의 대들보인 ‘양 이(李)’가 모두 탈락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나현 초단의 모습은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최후의 해답은 바로 대회 내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원성진’이었다.



 나현은 구리에게 2대0으로 꺾였으나 조용히 힘을 비축해 온 원성진이 중국의 자존심인 구리를 2대1로 잡았다. 최철한·박영훈과 함께 한국 바둑을 이끌고 갈 송아지 삼총사로 기대를 모았으나 좀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원성진이 위기에서 멋진 해결사로 등장했다.



 천재들은 늦어도 20대 초반에 정상에 오른다. 이창호 9단은 17세, 박정환 9단은 18세, 이세돌 9단은 19세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원성진은 26세에 첫 우승이니까 한참 늦었다. 하나 꾸준히 오르고 올라 남들이 내리막길에 들어설 나이에 드디어 정상에 오른 그 대목을 눈여겨 봐야 한다. 원성진 본인의 소감 그대로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온다.



박치문 전문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