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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국회의원은 감기도 안 걸리나

중앙일보 2011.12.09 00:00 종합 33면 지면보기
양영유
사회1 부장
어릴 적, 읍내 약국의 약사는 연예인보다도 더 유명했다. 곁두리를 이고 다녀 목이 뻐근한 아낙네들, 지게에 짓눌린 어깨가 쑤시는 아저씨들, 배가 살살 아픈 아이들에게 그 약사는 대단한 존재였다. 장날, 약국은 시골 환자들의 집합소이자 사랑방이었다. 50대 남성 약사는 손님 배를 만져보거나 체온을 재기도 했다. 약사는 농민들의 주치의였고, 이웃이었다. 약발이 잘 듣는다고 소문난 그 약국은 돈을 긁었다. 그 시절엔 약이 독한 것은 아닌지, 처방은 잘하는지 따지는 이가 없었다.



 약국의 추억을 더듬는 연유는 국회 처리가 무산된 약사법 개정안 때문이다. 올해 가장 나쁜 뉴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개정안은 감기약·해열제·진통제 등 가정상비약을 수퍼나 편의점에서도 팔게 하자는 게 골자다. 하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개정안을 전체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않고 뭉개버렸다. 전국 6만 명의 약사가 ‘약물 오·남용’을 명분으로 반발하자 꽁무니를 뺐다. 국민 83%가 찬성(보건사회연구원 조사)하는 제도를 내년 총선을 의식해 외면한 것이다. 약국은 동네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해왔다. 주민 발길이 잦으니 약사의 한마디가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지역구 의원들이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민의(民意)를 대변해야 할 국회의원이 이익단체 편에 선 대표적인 예다.



 약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입이 한창인 요즘, 약대에 붙는 수험생은 전국 최상위권 수재들이다. 그런 인재들은 대학에서 어렵고 깐깐한 공부를 한다. 약대 출신들은 신약 개발과 생명공학 분야 등에서 걸출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약(藥) 다루는 사(士)’가 된 이들이 웅지를 펴기엔 무대가 좁아 보인다. 의약분업이 되기 전까지 약사들은 전문성과 실력을 발휘해 자율적인 처방을 했다. 자부심이 상당했고, 좋은 처방을 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요즘 약사들은 기계적으로 일하는 인상이다. 의사들이 써준 처방전대로 이 약, 저 약 골라주는 단순 업무를 하는 것 같다. ‘고급 인재들이 할 일인가’라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대한약사회는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지 않은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주장한다. 감기약 등의 약국 외 판매를 반대하는 것은 집단이기주의도, 기득권 지키기도 아닌 국민 건강이 최우선이라는 전문직능인의 소신과 진정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고 싶지만 속내는 딴 데 있는 것 같다. 바로 매출 감소다. 전문가들은 약국 외 판매가 시행되면 약국 매출이 30% 이상 줄어들 것으로 본다. 타이레놀이나 판콜, 훼스탈, 신신파스 같은 일반 가정상비약을 약국에서만 팔겠다는 것은 억지다. 밤에 배가 아프거나 관절이 쑤셔도, 아이가 고열에 시달려도 사다 놓은 약이 없으면 다음날 약국 문을 열 때까지 끙끙 앓아야 한다. 그만한 일로 병원 응급실을 가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약사 중 93%가 약의 올바른 사용법을 환자에게 알려주는 복약지도(服藥指導)를 제대로 하지 않는 마당에 타이레놀을 편의점에서 사든, 약국에서 사든 뭐가 다른가.



 약사들과 짝짜꿍한 국회 보건복지위 의원(24명)들, 잘 기억해 두자. 국무회의까지 통과한 감기약 수퍼 판매를 찬성하는 이는 한나라당 손숙미 의원 한 명뿐이다. 의원들은 한밤중에 아파본 적도, 또 아플 일도 없는가 보다. 한·미 FTA로 감기약 수퍼 판매 이슈가 묻힌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의원들이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직권상정을 해서라도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국민의 인내를 시험하지 말라. 총선, 넉 달밖에 남지 않았다.



양영유 사회1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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