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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가발

중앙일보 2011.12.07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가발은 우리말로 다리이고 한자로는 체() 또는 체()다. 과거에는 가발보다 가체(加)라고 썼다. 변체(), 특계(特), 가계(假), 가결(假結), 가계(假)도 모두 가발이란 뜻이니 그만큼 옛날부터 유행했음을 뜻한다. 서기 전 12세기 인물인 주공(周公)이 지었다는 『주례(周禮)』에는 퇴사(追師)라는 관직이 “왕후의 머리 꾸미개(首服) 부편차(副編次)를 담당한다”는 기록이 있다. 부편차 중의 땋는다는 뜻의 편(編)자가 가발을 뜻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노(魯) 애공(哀公) 17년(서기 전 478)조에는 위(衛)나라 장공(莊公)이 가발 때문에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장공이 융주(戎州)에 갔다가 기씨(己氏) 부인의 아름다운 머리를 보고 강제로 깎아서 부인 여강(呂姜)의 가발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 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융주로 도주한 장공이 기씨에게 “살려주면 이 옥구슬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너를 죽이면 그 옥구슬이 어디로 가겠느냐”라면서 죽였다는 이야기다.

  가발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조선 후기 이덕무는 ‘복식(服食)’조에서 “변체()는 몽고(蒙古)의 유풍”이라고 말하고 있고, 『영조실록』 32년(1756) 1월 16일자도 ‘몽골 제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보니 『삼국사기』신라 성덕왕 22년(723) 당나라에 우황·인삼 등과 함께 이미 아름다운 가발(:미체)을 보낸 기록이 있었다. 이덕무는 부잣집에서는 가발에 무려 7만~8만 전(錢)을 쓴다고 비판하면서 열세 살짜리 부잣집 며느리가 각종 장식으로 무거운 번체를 달았다가 시아버지가 들어오자 급히 일어서다가 가발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져 죽은 사례를 들면서 “사치가 사람을 죽였으니 오호라 비통하도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는 사대부가 부녀자들의 가체(加)를 금하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게 한 데 이어 정조도 재위 12년(1788) 가체신금사목(加申禁事目)을 내려 가발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한때 가발은 한국 수출의 대명사로서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머리카락 상인들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미국이 대만산 가발을 금지시키면서 한국산 가발이 미국 시장을 독점해 1966년 수출액이 1062만 달러에 달했다(김광희, 『박정희와 개발독재』, 선인). 이 해 전체 수출액은 2억5575만 달러였다. 올해 우리나라가 ‘무역 1조 달러 클럽’에 가입했다는데 그 시작이 신라에서 당나라에 보낸 가발이었던 셈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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