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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로 일어서 드릴십까지 … 한국무역 1조 달러

중앙일보 2011.12.06 01:29 종합 3면 지면보기
5일 오후 4시 과천 지식경제부 수출입과. “과장님, 넘었습니다.” 관세청과 연락을 취하던 수출 담당 사무관의 말에 잔뜩 굳어 있던 안병화 과장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후 3시30분 기준으로 수출 5153억 달러, 수입은 4855억 달러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이 ‘무역 1조 달러 클럽’에 세계 아홉 번째 멤버가 되는 순간이었다.


세계 9번째 … 글로벌 교역 주연으로

 1조 달러 기록의 종지부를 찍은 건 이날 오후 관세청에 수출 신고된 심해 시추선 ‘드릴 십’ 두 척이었다. 두 척의 가격만 12억 달러가량이다. 수출 주역이자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우리 조선업계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선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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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5시 홍석우 지경부 장관이 1조 달러 돌파를 공식 선언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삼성동 무역협회를 찾아 “가발부터 시작해 내 기억에 1964년에 (수출이) 1억 달러였다”면서 “기업 오래 했던 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실제 그랬다. 47년 전인 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박충훈 당시 상공부 장관에게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연말까지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라”고 지시했다. 시골 여인네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드는 등 돈 되는 건 모두 내다 팔았다. 원화가치도 떨어뜨려 수출기업을 지원했다. 그해 11월 30일 수출은 1억 달러를 돌파했다. 정부는 이날을 ‘수출의 날’(현재 무역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이후 우리 무역은 말 그대로 고속질주했다. 74년 100억 달러를 넘어선 이후 88년 1000억 달러, 2005년 5000억 달러를 각각 돌파했다. 선발 8개국은 1000억 달러에서 1조 달러를 달성하는 데 평균 26.4년, 5000억 달러에서 1조 달러를 달성하는 데 8.4년이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각각 23년과 6년 만에 테이프를 끊었다.



 ‘1조 달러 클럽’의 기존 멤버는 미국·독일·중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영국·네덜란드다. 지경부 이운호 무역정책관은 “모두 전통적 산업·무역 강국이거나 중국과 같은 대국”이라며 “초기 산업화에 뒤처졌던, 식민 치하까지 경험했던 변방의 늦깎이 산업국이 세계 교역 무대의 ‘주연’으로 등극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잇따라 세계 경제를 덮친 상황에서 나온 성과라 더욱 값지다는 평가다. 우리 기업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07~2008년 2.7%에서 금융위기를 거친 2009~2011년 1분기까지 3%로 오히려 증가했다.



 하지만 ‘무역 2조 달러’로 가는 길은 험난할 전망이다. 우선 나라 밖 여건이 녹록지 않다. 재정위기와 경기침체가 덮친 선진국 시장의 향방이 안갯속이다. 7월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발효에도 불구하고 EU지역으로의 수출은 올 7~10월 5.5% 줄었다.



 나라 안 사정도 마냥 흥겹지만은 않다. 갈수록 벌어지는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주원인이다. 이른바 ‘낙수 효과’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의미다. 수출이 10억원 늘어날 때 95년에는 26명분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지만 요즘은 고용 창출이 9명 수준에 그친다.



 이런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선 한마디로 ‘새로운 수출 주역’들이 빠르게 부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박태호 교수는 “대기업 수출이 고용을 늘리는 효과는 구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면서 “고용 효과가 큰 중소기업과 부품소재 분야의 수출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서비스업의 경쟁력도 시급히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연구원 심영섭 선임연구위원은 “수출 증대를 통한 성장은 6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컨센서스였지만 이제는 성장의 체감도를 높이는 게 관건”이라며 “그러자면 무역·산업·투자·고용 정책과 제도를 정교하게 조화시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민근 기자





◆낙수 효과(trickle down effect)=수출이 늘고 대기업의 이익이 증가하면 이것이 차고 넘쳐 중소기업과 내수로 흘러들어가 생산량이 늘고 일자리가 창출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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