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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사법부 FTA 가이드라인 제시는 월권

중앙일보 2011.12.06 00:11 종합 37면 지면보기
왕상한
서강대 교수·통상법
모든 국민에게 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표현의 자유는 필수적이지만 절대적인 권리는 아니다. 이런 기초 상식을 20여 년 경력의 판사가 모를 리 없다. 또한 권력은 칼이다. 잘 쓰면 선이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치명적이다. 국가 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눈 것은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헌법도 입법권은 국회에,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그리고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현직 부장판사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놓고 법원행정처에 태스크포스 구성을 제안하겠다고 했다. 국민적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 FTA와 ISD 조항에 대해 법률의 최종적 해석 권한을 갖고 있는 사법부가 어떤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한·미 FTA에 불공정 요소는 없는지, 있다면 어떤 식으로 바로잡아야 할지, ISD 조항은 타당한지 등을 검토해서 발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제안에 120여 명의 판사들이 동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판사는 법률 전문가다. 하지만 판사라고 모든 법률에 정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판사만 법률전문가인 것도 아니다. 의사가 내과·외과·산부인과 등으로 전공 분야가 있는 것처럼, 법조인도 민법·행정법·국제법 등으로 전문 분야가 세분화돼 있다. 무릇 전문가로 인정받으려면 그 분야의 실무 경험이 충분하거나, 논문 등 연구실적으로 전문성이 입증돼야 한다. 우리나라 법원에 헌법·민법·상법·형법 등 분야의 탁월한 전문가들은 많다. 하지만 현직 판사 중 적어도 국제중재와 통상법 분야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거나 연구업적으로 전문성을 인정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위헌법률심판·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권한쟁의심판·헌법소원심판 등 5가지의 헌법재판권한을 행사한다.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는 헌법재판소가 판단한다. 법률적 효력을 갖는 조약의 헌법 일치 여부도 법원행정처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에서 그 시비를 가린다. 사법부가 한·미 FTA와 ISD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권한은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근거규정이 없다. 사법부가 연구팀을 결성해 대외에 공식의견을 낸다면, 이는 명백한 월권이다.



 전문성도 없고 권한도 없는 일을 왜 굳이 하려는 것일까.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했다. 법언이다. 법관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엄격한 ‘자기 절제’가 요구된다. 날카로운 이슈에 편향된 사견을 노출하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권리를 제약하고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판사가 언론에 나와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인터뷰까지 한 건 헌법의 기본원칙인 삼권분립을 무력화시키겠다는 발상이 아니었다면 경솔했다.



 한·미 FTA를 반대할 수 있다. 그리고 ISD는 국가 대(對) 국가의 소송이어야 할 사안을, 개인 대 국가의 소송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제기되는 우려를 단순히 기우라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한·미 FTA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건 몰라도 다른 나라와의 FTA에서 우리가 ISD를 넣자고 하는 마당에, 상대가 미국이라서 ISD를 못 하겠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ISD의 재협상을 약속했다. 이 문제는 국민이, 국회가, 정부가, 대통령이 풀어가야 할 일이다. 판사들이 사법부의 이름으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왕상한 서강대 교수·통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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