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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읊어 정 나누던 권주가, 일본식 구호로 바뀌어

중앙선데이 2011.12.03 22:41 247호 14면 지면보기
건배와 건배사의 역사는 술의 역사만큼 길다. 서양에서 건배는 술잔을 상대방과 부딪쳐 술이 넘나들게 함으로써 독살에 대한 의심을 없애게 한 데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같은 병에서 나온 술을 함께 비워 신뢰를 주고받는 중국의 ‘간베이(乾盃)’와 유래가 비슷하다. 같은 한자를 일본에선 ‘간파이’라 읽고 한국에선 ‘건배’라고 읽는다. 건강을 기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술잔을 단번에 말려버리자고 하는 한·중·일의 ‘건배’는 어쩌면 모순적인 표현이다.

건배사의 역사

영어권(cheers), 독일어권(prost), 불어권(Sante), 이탈리아(Salute 등) 등 대부분의 건배사는 상대방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브라질 등에서는 잔 부딪치는 소리(Tim-Tim)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서양 영화속 건배사는 더욱 가슴 설렌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먼과 잔을 부딪히며 속삭인 명대사, ‘Here’s looking at you, kid.’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번역도 원문 못지않게 근사하다.(오른쪽 작은 사진)

우리 조상들은 좋은 술을 상대에게 권하고 나누는 과정을 즐겼던 듯하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하는 송강(松江)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와 같은 명시를 읊어가며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으니, 이보다 더 멋진 건배사가 따로 없다. 멋과 정을 담은 우리 고유의 ‘술 권하는’ 풍습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적잖이 변했다. 특히 참석자가 모두 기립해 잔을 들면 윗사람이 선창을 하고 아랫사람들이 화답하는 일본식 건배가 들어오며 다정히 술 권하던 풍습은 일사불란하고 권위적인 것이 됐다. 군사정권 시절의 건배사는 대개 이런 딱딱한 형식에 맞춰 ‘건배’나 ‘위하여’를 구호에 가깝게 외치는 것이었다.

건배사는 시대상에 맞춰 변화를 겪는다. 그 시대의 정치상황을 반영하거나 비판·풍자를 담은 건배사가 유행을 타기도 했다. 지역감정이 정치판을 휩쓸던 1990년대 초중반의 ‘우리가 남이가’가 대표적이다. 이는 1992년 12월 11일 대선을 앞두고 터진 ‘초원복집’ 사건이 발단이다. 당시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이용하려던 시도가 문제가 됐지만, 불법도청이 더 부각되면서 김영삼 후보의 당선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신 건배사로는 오래 살아남아 기억되고 있다. 비슷한 무렵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이란 말도 유행했다.

DJ 정부 시절에는 건배사의 고전 ‘위하여’를 당시 제1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위하야(野)’로, 자민련은 ‘위하자(自)’로 바꿔 부르곤 했다. 17대 대선 무렵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는 ‘이대로(이명박을 대통령으로)’라는 건배사가 쓰였다. 이 후보 당선 뒤에는 여권 인사나 고위 관료들이 ‘이대성(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위하여)’으로 바꿔 쓰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런 건배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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